4차 산업혁명 '길목' 선점한 日 소프트뱅크만의 저력은
입력 2017.07.20 07:00|수정 2017.07.21 10:03
    '10兆' 비전 펀드 조성 마무리
    자회사 'ARM' 및 기업간 제휴로 '4차 산업' 주도권 선점
    글로벌 IT 유망 스타트업 투자유치 1순위 거론
    손정의 배우기 나선 국내 IB·재계
    • “1조엔 이익은 숫자에 불과해 솔직히 별다른 감동이 없습니다. 앞으로 등반해야 할 산이 눈앞에 있고 큰 뜻이 가슴 속에 명확히 보입니다”…"지금 인생이 즐겁고 재밌어 어쩔 줄 모르겠습니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 IR 현장)

      지난달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주주들 앞에서 약 두 시간 동안 진행된 투자설명회(IR)을 직접 주재했다. 현장에선 일종의 ‘퍼포먼스’가 펼쳐졌다. 시작은 IT 버블로 회사가 위기에 처한 2004년, 주주들의 항의 속에서 ‘빅 드림(Big Dream)'을 설명하는 손 회장의 모습이 담긴 동영상이었다. 곧이어 곡절을 겪으며 성장한 소프트뱅크의 모습이 소개됐다. 대미를 장식한 장면은 소프트뱅크가 100조원 규모의 비전 펀드(Vision Fund) 조성에 성공했다는 회사의 공식 발표였다.

      IT 업계에선 인공지능(AI)‧사물인터넷(IoT)‧로봇·핀테크 등 이른바 실체가 잡히지 않는 ‘4차 산업혁명’ 분야에서 밑그림을 그려가며 미래 산업을 이끌고 있는 소프트뱅크와 손정의 회장의 자신감이 드러난 사례로 꼽고 있다.

      ◇ 100조 '비전 펀드'는 손 회장 자신감의 산물

      국내외 투자업계에선 비전 펀드 독특한 구조에 주목한다. 소프트뱅크는 운용사(GP)로 참여해 약 31조원(280억달러)를 출자하고, 사우디아라비아 국부펀드·애플·폭스콘·퀄컴 등 주요 투자자(LP)가 22조원(200억달러)을 출자한다. LP들은 44조원(400억달러)의 투자금을 펀드의 부채(Debt) 명목으로도 출자했다.

      투자자 입장에선 투자 수익을 배분받으면서 동시에 12년 동안 매년 부채의 7%씩 이자 수익을 얻는다. 투자 리스크가 큰 미래 기술에 투자한다는 불안감을 덜 수 있는 셈이다. GP인 소프트뱅크 입장에서도 나쁠 것이 없다. 주요 LP들보다 자본 명목으로 투자한 자금이 많아 투자한 회사에 대한 주도권을 쥘 수 있어서다.

      '아직 이익이 나지 않은 기업'에 투자해온 소프트뱅크의 투자철학이 반영된 펀드란 평가다. 한 벤처캐피탈(VC) 업체 관계자는 "통상적으로 LP들은 (펀드가) 영업이익 등 현금이 충분히 나오는 회사에 투자해야 리스크 관리가 됐다고 판단해 출자한다"며 "소프트뱅크는 성장 잠재력만 보이는 곳에 투자하는 일이 많다보니 이 같은 LP들의 투자 리스크를 상쇄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했던 것"이라며 펀드 구조가 특이한 이유를 설명했다.

      소프트뱅크에 정통한 투자업계 관계자는 "손 회장이 펀드 주요 출자자인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에 설명한 것은 장황한 투자계획이 아닌 과거 투자 성과와 개인적인 투자 철학 그리고 18년간의 평균 IRR(내부수익률) 44% 라는 숫자였다"고 귀띔했다.

      ◇ 4차 산업 혁명 길목 읽는 ARM + 두둑한 '금고' 비전 펀드

      결국 LP들의 신뢰의 원천은 손정의 1인의 투자 철학으로 수렴된다. 손 회장은 지난해 ARM 인수와 함께 '기술 특이점(SINGULARITY) 확보'를 주요 투자 전략으로 제시했다. ARM은 현재 저전력 반도체 설계 시장을 사실상 독점하고 있다. 고객사들의 기술 투자 방향을 읽은 후 비전 펀드를 통해 유망한 회사에 지분 투자하거나 인수·합병(M&A)를 단행하겠다는 전략이다. 데이터 처리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AI·IoT‧빅데이터 분야의 핵심 기술인 저전력 반도체 시장을 선점해 향후 열릴 시장의 길목을 선점하겠다는 복안이다.

      이에 맞춰 M&A 및 기업 간 연합 조성에도 속도를 늦추지 않고 있다. 지난 5월엔 약 4조원을 투자해 그래픽처리장치(GPU) 부문 선두 기업인 엔비디아(NVIDIA) 지분 5%를 취득했다. 같은 시기 구글로부터 로봇 회사인 ‘보스턴 다이나믹스’를 인수하기도 했다.

      한 IT업계 관계자는 "회사가 ARM 인수를 두고 10년 전인 2006년부터 스터디를 했지만 당시엔 재원마련 및 투자 우선순위 문제로 미뤄졌다"며 "당시 1조원 수준인 회사를 지난해 34조원에 사게 된 셈"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국내 대기업 환경에서 ‘싸게 살 수 있었던 회사를 34배 비싸게 인수해야 한다’는 제안을 의사결정자에게 올릴 수 있을지는 물음표"라고 말했다.

      또 “엔비디아도 일찌감치 AI분야에서 가장 각광받는 회사로 알려져 주가가 수직 상승했지만 소프트뱅크는 수업료(Enterence Fee)로 4조원을 들여 지분 5%를 인수했다”라며 “국내 기업이 소프트뱅크에 배울 점은 IT 분야에선 1조~2조원의 ‘잠재력 있는 회사’를 사는데 집중하는 게 아니라 10조원이 넘는 ‘좋은 회사를 비싸게 사는’ 결단력도 필요하다는 점”이라고 설명했다.

    • 기술 잠재력을 지닌 글로벌 IT 스타트업 기업에 대한 투자도 끊이지 않을 전망이다. 지난해에도 초기 단계 투자에 나섰던 슈퍼셀(IRR 기준 93%), 알리바바(IRR 68%) 등에서 투자 성과를 거뒀다. 투자자들은 소프트뱅크가 성장기를 지난 IT 유니콘 기업(기업가치가 1조원 이상으로 평가받는 스타트업)들에 대한 일종의 ‘인덱스(index) 펀드’ 역할을 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관계자는 “현재 소프트뱅크가 임대 중인 본사 건물이 일본 내 금싸라기 땅에 있다 보니 (소프트뱅크) CFO가 손 회장에게 2년치 임차료를 모아 사옥을 매입하자고 건의한 적이 있다"면서 "손 회장은 '부동산엔 투자하지 않는다'는 투자 철학을 시장에 보여줘야 한다며 의도적으로 임대 계약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웃백에 투자해야 했던 국내 IT 투자 전문 사모펀드(PEF) 운용사와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초기단계 기업을 발굴하는 안목이 알려지며 중국‧인도‧동남아시아 등 세계 시장에서도 영향력을 확보했다. 투자 유치가 필요한 기업들이 가장 먼저 ‘러브콜’을 보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셈이다. 국내에서도 1조원 규모 쿠팡(Coupang) 투자는 물론 카카오모빌리티 투자도 검토하는 등 보폭을 넓히고 있다. 글로벌 투자은행(IB)들도 일찌감치 투자처를 물색해 소프트뱅크 제시하고 있고 일부 IB들은 소프트뱅크와의 협업 이력을 강조해 역으로 IT기업들에 투자를 제안하고 있다.

      한 IB업계 관계자는 “소프트뱅크를 보면 손 회장의 의욕이 넘치고, 회사는 늘어난 투자에 적자가 쌓였을 때 주가가 오르고 외려 회사가 이익을 거두기 시작했을 땐 주가가 떨어지는 모습도 보인다"며 "손 회장이 단기 실적에 안주하지는 않을까 우려하는 투자자들의 모습이 반영된 것"이라고 말했다.

      ◇ 손정의 배우기 나선 국내 재계·IB

      국내 투자업계는 물론 재계에서도 소프트뱅크 배우기가 한창이다. 원류 격인 통신업이 대표적이다. SK텔레콤은 임원진을 대상으로 정기적인 세미나를 가지고 있고 부장급 이상 인력을 대상으로 일본 소프트뱅크 본사 견학도 추진하고 있다. 권영수 LG유플러스 부회장 역시 사석에서 소프트뱅크에 대한 정보를 수집할 정도로 남다른 관심을 보이고 있다.

      네이버‧카카오로 대표되는 이른바 판교 기업들의 투자 철학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도 나온다. 각 사의 투자전담 조직들은 그간 광고·게임 등 회사의 주력 사업과 인수 대상 간 시너지를 우선적인 투자 결정 요인으로 두었던 것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후문이다. 성장 잠재력이 높은 초기 기업을 발굴해 투자 수익도 거두고 동시에 미래 사업 방향을 구체화하는 '소프트뱅크식 투자 전략'을 스터디하고 있다.

      투자 여력 측면에서 삼성전자와 글로벌 기업을 두고 인수 경쟁을 펼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삼성전자가 주주들을 대상으로 약 70조원을 적정 보유 현금으로 제시하면서 잉여 재원을 활용한 M&A 및 지분 투자가 활발해질 가능서이 커졌다. 미국 실리콘밸리에 기반을 둔 투자조직 '삼성 넥스트'는 이재용 부회장이 경영 전면에 나선 이후 동력을 얻었다. AI·IoT·로봇 등 기술 기업 인수에 속도를 내고 있다.

      다른 IT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 내부에서 로봇과 빅데이터 관련된 매물을 꾸준히 찾고 있다"며 "해마다 최소 10조~20조원에 달하는 M&A를 추진할 만한 두둑한 곳간을 가진 삼성전자와 100조원 규모 펀드를 가진 소프트뱅크 간 매물을 둔 투자 경쟁이 벌어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