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노트]
반도체와 인연 없지만 줄을 놓을 수도 없는 LG
이도현 팀장 | dohyun.lee@chosun.com | 2017.12.0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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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하이닉스가 매물로 나왔을 당시 재계와 시장의 관심은 LG그룹으로 쏠렸다. LG그룹은 1997년 외환위기 때 눈물을 흘리며 LG반도체를 현대전자로 넘겨야 했다. 2000년대 초반 반도체시장 불황으로 현대전자는 부도가 났다. 현대전자는 채권단 관리로 넘어갔고 사명도 하이닉스반도체로 바뀌었다. 'LG가 하이닉스를 인수해 반도체 재기를 다짐할 것인가'는 주목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이닉스 인기는 웬만해서 올라가지 않았다. 기업가치는 바닥으로 떨어져 몇 천억원만 있어도 당장 인수할 수준이었지만 관심을 보이는 이조차 없었다. 2007년 들어 반도체 시장이 턴어라운드 할 조짐을 보이면서 주목을 조금씩 받긴 했지만 인수 계약까지 이어지진 못했다. 글로벌 투자은행(IB)들은 인수 후보들을 찾아 국내외 여기저기 돌아다녀야 했다. 국내에선 포스코, 한화, 현대중공업, 효성, 동부 등이 거론됐고 모기업이었던 LG는 말 할 것도 없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하이닉스는 SK그룹 품에 안겼다. 이후 반도체 슈퍼사이클(대호황)을 맞아 SK하이닉스는 고공 행진하며 이제는 SK그룹의 핵심 계열사로 자리매김했다.

IB 시장에도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LG실트론도 SK 계열사가 됐다. SK는 올해 1월 LG그룹으로부터 실트론 지분 51%를 6200억원에 인수했다. 실트론은 매각 작업을 거쳐 8월에 SK그룹으로 옮겼다. SK는 남은 지분도 직간접적으로 취하며 사실상 지분 100%를 확보하게 됐다.

실트론은 국내 유일 반도체용 실리콘 웨이퍼 생산업체다. 1990년 LG그룹 계열사였던 럭키소재가 동부전자통신의 경영권을 인수하면서 실트론으로 이름을 바꿨다. 실리콘 웨이퍼가 회사의 주력 상품으로 자리잡은 것도 이 때다. 2008년 이후 공급과잉으로 실적 부진을 겪으며 부침을 겼었는데 역설적이게도 하이닉스를 인수한 SK가 실트론을 인수하자 상황은 역전됐다. 올해 반도체 슈퍼사이클을 타고 부진에서 탈출한 것이다. 주력제품인 300㎜ 웨이퍼 가격이 전년대비 20% 이상 올랐고 출하량도 사상 최고를 기록하는 등 업계 호황을 톡톡히 누렸다.

11월 마지막 날, ㈜LG는 자회사 루셈의 보유지분 68%를 국내 반도체업체 엘비세미콘에 750억원에 전량 매각한다고 공시했다. 루셈은 디스플레이 구동칩 후공정 자회사로 LG와 일본 로옴세미컨덕터의 자회사 래피스반도체가 지난 2004년 설립한 합작사다. LG는 “자산 효율성 제고를 통한 신성장사업 육성을 강화하기 위해 처분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로써 LG그룹은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 업체)인 실리콘웍스를 제외한 반도체 관련 계열사를 모두 매각했다. 2014년 LG가 인수한 실리콘웍스는 디스플레이 구동칩 외에도 스마트워치, 커넥티드카에 탑재되는 시스템칩도 개발∙공급하는 것으로 알려져 원자재를 만드는 기존 반도체 사업과는 궤를 달리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말 그대로 LG가 손을 뗀 반도체 사업은 모두 미운 오리 새끼에서 백조로 재탄생했다. 이 때문에 시장에선 “LG가 반도체와는 정말 인연이 없나 보다” “LG가 차린 밥상을 SK가 먹는다” 등등 LG 입장에선 쓴웃음 지을 수밖에 없는 얘기들이 나오고 있다.

지난 10년간 LG는 반도체 대신 애플, 삼성전자에 뒤쳐진 스마트폰 경쟁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조 단위 대규모 자금을 쏟아 부었지만 그 결과는 처참했다. 이제는 ‘중국 업체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라는 생존 자체를 걱정해야 할 판이다. 그룹 인사에서도 모바일커뮤니케이션(MC) 사업본부의 처지가 드러난다. 10분기 연속 적자 끝에 조준호 사장이 물러나고 황정환 단말사업부장이 부사장으로 승진해 사업부를 이끌게 됐다.

물론 LG가 반도체 사업을 계속 영위했다고 해서 지금의 호황을 다 누렸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1997년말 세계 반도체시장은 삼성전자(18.8%), NEC(12.1%), 현대전자(9%), 히타치(8.2%), 마이크론(7.9%), 마이크론(7.9%) 순이었다. 그런데 얼마 뒤 이른바 ‘램버스’ 사태가 터지면서 삼성전자를 제외한 모든 업체들이 나락으로 떨어진다. 당시 메모리 반도체는 크게 DDR램과 램버스D램으로 나뉘었다. 삼성전자는 DDR램에 집중했고 NEC, 히타치, LG반도체, 마이크론 등은 램버스D램에 올인했다. 그런데 주요 고객인 인텔이 램버스D램을 포기하고 DDR을 선택하면서 램버스D램에 투자했던 회사들은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

NEC와 히타치는 반도체 사업부 합작사인 엘피다의 지분을 전부 포기했다. 마이크론도 이때의 피해를 완전히 복구하지 못해 영원한 3위가 됐다. 그 사이 LG는 이미 LG반도체를 현대전자에 넘긴 상태였다. 현대전자는 LG반도체의 램버스 손실을 고스란히 떠안게 됐고 이 손실을 감당하지 못해 결국 해체되고 만다. 하이닉스로 재탄생하면서 현대전자가 DDR D램에 투자했던 저력을 바탕으로 단숨에 업계 2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사실상 지금의 SK하이닉스가 있었던 데 LG의 역할은 크지 않기에 배 아파할 이유도 없다는 얘기다. 오히려 그 때 반도체를 넘기지 않았다면 지금의 LG전자도 없었을 것이라고 보는 게 더 현실적일 수 있다. 또 반도체가 전자 사업부 내 서열에서 밀려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을 것이라는 안팎이 냉정한 평가도 있다.

시장에선 반도체 관련 기업 매각을 두고 LG가 신사업을 위해 ‘선택과 집중’ 전략을 취하는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현재 LG가 추진 중인 신사업은 사물인터넷(IoT) 가전과 자동차 전장산업이다. 반도체 원자재 사업은 정리했지만 신사업을 뒷받쳐 줄 시스템 반도체 사업은 확장할 개연성이 있다. 실리콘웍스를 통해 전력반도체(PMIC)사업을 키워 자동차부품사업과 시너지를 낼 수 있다. 전력반도체는 전력변환이나 모터제어 등을 통해 배터리의 전력소모량을 최소화하는 역할을 한다. 모바일뿐 아니라 전기자동차(EV)와 에너지 저장장치(ESS)의 핵심부품으로 들어간다. 실리콘웍스는 LG전자의 디스플레이용 시스템반도체 설계부문을 인수했고, 루셈 매각 전에 시스템 집적회로(IC) 사업 일부를 떼 내 인수하기도 했다. 시스템 반도체에선 LG가 웃을 수 있을까.

[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2017년 12월 01일 10:52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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