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 너무 모른다”…정부 정책發 나비효과에 부글부글
입력 2018.02.22 07:00|수정 2018.02.21 18:31
    정부, 금융·산업 가리지 않고 압박
    기업 투자 위축…좀비기업만 양산
    15년 공부에도 후퇴 '참여정부 2기'
    방향 설정 없어 부처끼리 불협화음
    PEF·자문업계 "오히려 투자 기회"
    • 정부가 설익은 정책을 잇달아 내놓으며 시장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다. 필요한 정책은 뒷전이고 그나마 내놓는 것들은 예기치 못한 후폭풍을 불러오기 일쑤다. 방향성 설정 없이 문제만 제기하다 보니 정부 부처끼리도 입이 맞지 않는 모습을 자꾸 노출하고 있다.

      정책 실효성은 떨어지는데 실현 방식조차도 세련되지 않다. 정책의 당위성을 시장에 이해시키기 어려우면 부처 수장들이 나팔수로 나서 여론의 힘을 빌리고, 반발이 심해지면 말을 바꾸는 식이다.

      ◇시장 혼란 부추기는 정부의 ‘보이는 손’

      정부가 가장 손 쉽게 정책 효과를 내는 방법은 예나 지금이나 시장의 돈 줄인 금융사를 활용하는 것이다. 정부가 생산적·포용적 금융이라는 기치를 내걸면 금융사들은 그럴싸하고 부담되지 않는 사업으로 발을 맞춘다. 자연히 정책 효과가 반감되거나 부작용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정부 압박에 주택담보대출은 제자리 걸음을 걸었지만 그 빈자리는 중소기업보다는 가계 일반대출이나 소호(SOHO, 개인사업자)대출로 채워졌다. 부동산 시장 규제 효과는 없었고 ‘똘똘한 한 채’를 마련하자는 열기만 뜨거워졌다.

      금융사 경영진의 군기를 잡으려는 움직임은 여전하다. 최근 CEO 선임 및 연봉에 대한 문제 제기, 대대적인 채용비리 조사 등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여러 인허가 사안은 석연치 않은 이유로 반려되거나 공회전 상태다. 금융당국은 ‘적폐청산’을 이유로 기존 인사들이 대거 물갈이 되면서 아직 기본 업무 숙지도 안 된 경우가 많다. 반면 특정 사안에 대해서는 부임하자마자 사안의 전말을 꿰뚫고 있기도 해 특혜 의혹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금융사 임원은 “정부가 마음먹고 콕 찍어서 규정을 들이대면 문제되지 않을 곳이 어디 있느냐”며 “금융 정책은 파급력이 크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이뤄지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이번 정부의 움직임은 영 점잖지 않다”고 말했다.

      기업들은 일자리, 친노동에만 초점이 맞춰진 정부 정책에 피로감을 토로한다. ‘소득주도 성장’을 위해 최저임금을 급격히 올렸지만 기대한 소득 증가보다는 고용 축소 효과가 두드러진다. 근무 시간은 줄여야 하는데 ‘노동이사제’ 도입 등 압박 수위는 높아진다. 스튜어드십코드로 대변되는 주주권 강화 정책도 신경 쓰이긴 매한가지다. 연기금을 통한 기업 영향력 강화가 우려된다는 지적이다.

    • 정부의 ‘가벼운 입’도 기업들엔 부담 요소다. 백운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지난해 금호타이어 매각 당시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을 두둔하는 듯한 훈수를 뒀고, 업계 간담회에선 중국 투자의 위험성을 언급하며 중국에 진출하려던 대기업의 발목을 잡았다. 다른 자리에선 기업 간 제품을 비교하는 발언을 해 부적절하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살릴 기업은 위축, 정리할 기업은 생명 연장

      미국은 법인세를 인하한 후 기업이 활기를 띠고 고용도 늘어났지만 우리나라는 반대로 대기업의 세금 부담이 커졌다. 정책 초점은 기업의 사업 경쟁력 강화보다는 지배구조 개선이나, 총수 일가 견제에 맞춰져 있다.

      재벌 대기업들이 기업하기 척박한 환경에서 수십년간 쌓은 역량은 충분히 경쟁력이 있지만 제도적·정서적 뒷받침이 부족해 아쉽다는 지적이다. 대기업들이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투자하려 하지 않다 보니 ‘낙수효과’도 기대하기 어렵다.

      증권사 채권 담당 임원은 “대기업들은 금리가 오를 것으로 전망되면 미리 채권을 찍어 돈을 쌓아두곤 했지만 올해는 분위기가 다르다”며 “빌린 돈으로 새로 투자해서 돈을 벌어봐야 견제만 많아지기 때문에 지금의 안정적인 현금흐름에 안주하려는 분위기가 많아졌다”고 말했다.

      정부는 '4차 산업혁명’을 강조하지만 이전 정부와 차별성도 찾기 어렵다. 실제 규제 완화보다는 정책 홍보 효과에 몰두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시장에 돈은 많이 풀고 있지만 향후 먹거리를 만들어 낼 가능성이 있는 회사보다는 이미 알려진 회사들만 수혜를 받는 모양새다.

      기업 구조조정은 손도 못 대고 있다. 전 정부의 실책이 이어진 대우조선해양이나 금호타이어는 차치하더라도 대우건설 매각에 실패하며 컨트롤 능력 부재를 여실히 드러냈다. 정부의 관심도 ‘지속 가능한 양질의 일자리’보다는 ‘눈앞의 일자리’로 옮겨간 듯 하다. 사업성이 악화하는 성동조선과 STX조선해양에 대한 결정도 차일피일 늦어지고 있다.

      한국GM은 더 큰 문제다. 절묘한 시기에 지원을 요구하고 나선 GM 본사에 선수를 빼앗겼다. 정부가 자구안을 내놓으라 반격에 나섰지만 GM은 군산공장 폐쇄로 맞불을 놨다. GM이 한국 시장에서의 회수 극대화를 노리고 있다는 지적이 많지만, 30만 일자리와 6월 지방선거 프레임에 갇힌 정부가 꺼낼 묘수가 있을지 의문이다.

      ◇"盧 정부 때도 이렇지 않았는데"…15년 공부는 어디로

      정부의 경제·산업 정책에 조력하는 인사들은 이번 정부의 성공에 자신감 가진다. 노무현 정부 초기 4년간 공부한 정책이 마지막 1년간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이후에도 10년간 공부할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종종 한다는 전언이다.

      15년 공부에 고르고 고른 인사까지 모였지만 정책 실현은 순조롭지 않다. 비트코인 규제나 부동산 정책 등 부처끼리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거나 오락가락한 모습을 보인 사례는 부지기수다. 지난해 최종구 금융위원장이 연기금 투자 확대를 골자로 하는 코스닥 활성화 방안을 내놓자 김성주 국민연금은 ‘오보’라며 반박했고, 최종구 위원장이 한 발 물러선 사례도 있었다.

      증권투자업계 관계자는 “금융당국과 국민연금이 합의하지 않은 내용을 시장에 고지하다 보니 코스닥이 투기판이 돼 버렸다”며 “하루 이틀 사이에 100포인트가 오르내리는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KRX300까지 발표하며 시장의 불확실성을 키웠다”고 말했다.

      외국법인 과세 범위를 확대하려다 철회한 사건에서도 정부의 미숙함이 드러났다. 실효가 크지 않다는 점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기계적 평등’을 구현하려다 정책 신뢰도만 떨어뜨렸다. 외국 투자사 관계자는 “정부가 전문성이 있었다면 검토 단계에서 멈출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참여정부 2기’에 걸었던 기대는 옅어지는 모습이다. 그 동안 변화한 산업 지형을 도외시하다 보니 오히려 정책이 미숙하고 뒤처졌다는 지적도 있다. LG카드 사태를 조기에 해결했던 구조조정 능력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기관투자가 관계자는 “노무현 정부 때는 국민연금 투자 전문가들의 최대 덕목이 실력과 도덕성이었고, 보건복지부가 압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윗선에서 막기도 했다”며 “지금은 정부가 국민연금을 활용해 시장에 작정하고 개입하려는 것 같아 걱정이다”고 말했다.

      이 와중에 공무원의 보신주의는 점점 강화하고 있다. 실무선에선 정책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보다 내려온 지시를 따르는 데 급급하다. 얼굴 보기 어려운 부처 수장의 의중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보니 외부 행사나 언론에서의 발언을 통해 지레짐작하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전언이다.

      ◇"불확실성은 기회"…PEF·자문업계는 외려 반색

      정부가 불러온 불확실성은 커졌지만 사모펀드(PEF)나 자문 업계에선 이를 반기는 모양새다.

      PEF 운용사 관계자는 “정부가 오락가락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거래하는 입장에선 전혀 영향이 없다”며 “시장이 불확실하면 사업을 내놓으려는 기업도 많을 것이기 때문에 요즘 같은 때가 투자하기 오히려 낫다”고 말했다.

      대기업들은 주력 사업을 정하고 그에 맞지 않는 것들은 발 빠르게 정리해 나가고 있다. 정부의 지배구조 개선 요구에 따라 불가피하게 내놔야 할 소수지분도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신사업 자금이 필요하면 재무적투자자(FI) 자금을 유치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외국계 IB 관계자는 “재벌 대기업들은 글로벌 시장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역량을 많이 쌓았고 지금도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다”며 “기업들이 선제적으로 체질 개선에 나선 상황인데 IB들이 일거리가 없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라고 기대감을 표했다.

      다만 PEF에 투자 기회가 늘어나는 것이 국가 경제 전반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따져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국가 경제와 고용에 영향이 큰 대기업들은 국내 자금을 받은 PEF들이 관심은 있어도 투자하기 어렵다. 그보다 훨씬 덩치가 큰 글로벌 PEF들에 대부분의 투자 기회가 돌아갈 것으로 보인다. 투자에 따른 이익도 외국 출자자(LP)에 귀속될 가능성이 크다. 반대로 국내 PEF에 기회가 있더라도 ‘고용 감축에 따른 비용 절감’이 주요 운용 전략이기 때문에 일자리 감소만 불러올 것이란 우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