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에 무관심한 정부...얼치기 정책 난무
입력 2018.02.22 07:00|수정 2018.02.23 10:03
    초대형 IB 도입 추진 '지지부진'
    '공매도 유증 규제'도 제자리걸음
    공모주 펀드 수익률 악화 불 보듯
    '코너스톤 투자자제' 법 위반 소지
    • "새 정부가 자본시장에 큰 관심이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얼치기일줄은 몰랐습니다." (한 대형증권사 고위 임원)

      정부와 유관기관이 잇따라 내놓고 있는 금융부문과 자본시장 정책들이 한결같이 시장의 싸늘한 시선을 받고 있다. 중장기적인 청사진 없이 탁상공론과 임기응변에 기반한 자가당착식 정책들이 난무한다는 지적이다. 이로 인해 금융부문은 새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 우선순위에서 한참 밀려나 있는 것 아니냐는 푸념들이 나오고 있다.

      당장 정부가 도입을 약속한 정책들부터 공회전 중이다. 초대형 금융투자사업자(초대형IB)에 대한 발행어음업무 허용이 대표적이다.

      현재 초대형 IB의 기본 자격 요건인 자기자본 4조원 이상을 충족하는 국내 증권사는 모두 5곳이다. 이중 발행어음업 인가를 받은 건 한국투자증권 한 곳 뿐이다. 삼성증권과 미래에셋대우는 대주주 이슈 등으로 금융감독원의 심사가 중단됐고, KB증권은 철회했다. NH투자증권에 대한 심사는 기존 시장의 예상과는 다르게 차일피일 늦어지고 있다.

      증권사들은 지난해 상반기부터 유상증자를 완료하고 초대형IB 관련 부서를 설치해 준비작업을 진행해왔지만, 지금은 사실상 '올 스톱' 상태다. 의무적으로 기업금융에 50% 이상 투자해야하는 발행어음 도입이 늦어지며 정작 정부가 원하는 '모험자본' 공급 역시 늦어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부당한 차익거래를 막겠다는 목적으로 도입이 추진되고 있는 '공매도 투자자 유상증자 참여 제한' 규제는 2년째 공회전 중이다.

      이 규제의 핵심은 유상증자를 한 순간부터 신주의 가격이 확정될 때까지 공매도에 나선 투자자는 증자로 발행되는 신주를 받을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미국과 일본 등 선진 시장에선 이미 금지돼있는 거래 수법이다.

      자본시장법 제 180조 '공매도의 제한' 조항을 고쳐야 해결되는 문제지만, 국회는 이 법안이 발의된 이후 단 한 차례도 제대로 심사하지 않았다. 그 사이 현대중공업과 삼성중공업, 카카오가 '공매도 폭탄'을 맞았다. 국내 규제 미비로 인해 발행사는 공매도로 떨어진 주가로 발행가액을 산정해야 하고, 주가 하락의 피해를 소액 주주들이 입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앞뒤가 맞지 않거나 의욕만 앞선 정책도 시장의 혼란만 부추기고 있다. 당장 정부가 내놓은 코스닥 시장 활성화 방안 때문에 기업공개(IPO) 투자 수요의 상당 부분을 책임져왔던 공모주 펀드가 '쭉정이'로 몰락할 신세가 될 우려가 커졌다.

      정부가 코스닥 벤처펀드에 코스닥 공모 물량의 30%를 우선 배정하겠다는 방침을 포함해서다. 일반적으로 IPO때 모집 혹은 매출하는 주식의 20%는 우리사주조합에, 20%는 개인투자자 일반청약에, 10%는 하이일드펀드에 우선 배정된다. 30%를 따로 떼어내 코스닥 벤처펀드에 우선 배정하면 공모주 펀드를 비롯한 일반 기관은 나머지 20%를 가지고 경쟁해야 한다.

      당장 현 시점 기준 2조8000억원 규모로 설정돼있는 공모주 펀드의 수익률 악화가 불 보듯 뻔한 상황이다. 공모주 펀드 수익률이 낮아지면 그만큼 자금 유입이 줄어 전체 공모주 펀드 규모가 줄어들고, 수요 기반 위축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코스닥 벤처펀드는 공모주 펀드와 투자 형태와 감당해야 할 리스크가 아예 다른 상품이기도 하다. 공모주 펀드는 안전자산 비중을 증시 상황에 따라 조정하며 저위험 중수익을 노리지만, 코스닥 벤처펀드는 벤처 및 코스닥 기업 주식을 6개월 단위로 50% 이상 보유해야 하는 전형적인 고위험 고수익 펀드인 까닭이다. 운용사들이 공모주 배정 특혜에도 벤처펀드 설정을 망설이는 이유다.

      한국거래소 유가증권시장본부가 대형 상장공모를 지원하겠다며 꺼내든 '코너스톤 투자자'(초석 투자자) 제도도 '공모'라는 제도의 틀을 흔들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코너스톤 투자자 제도는 2007년 홍콩 증시에서 만들어져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 증시에서 주로 활용되고 있다. 상장 공모 전 발행사와 주관사가 핵심 투자자를 미리 유치, 주식을 배정하는 것이 핵심이다. 코너스톤 투자자는 확정 공모가로 지분을 인수하며, 6개월 이상 자진 보호예수를 건다.

      코너스톤 투자자 제도의 핵심은 증권신고서 제출 전 '사전 투자자 확보'에 있다. 이는 자본시장법에서 금지하고 있는 '사전공모' 행위다.  증권신고서 제출 이전에 투자자를 유치하며 청약을 권유한 셈이기 때문이다. 자본시장법 제119조 1항은 '모집 또는 매출은 신고서를 금융위원회에 제출해 수리되지 않으면 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특정 투자자만 우대한다는 특혜 논란이 불거질 수도 있다. 그렇다고 증권신고서 제출 이후에 코너스톤 투자자를 모집한다면 현재의 수요예측 제도와 다를 바가 없다.

      자산운용업계의 숙원 사업 중 하나였던 기금형 퇴직연금제도 도입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미뤄지고 있다. 주무부처인 고용노동부가 정부입법안을 연초 철회했다.

      기금형 퇴직연금제는 기업이 독립형 신탁기관을 설립해 퇴직연금을 맡기고, 전문가로 구성된 기금운영위원회를 통해 자금을 운용하는 제도다. 현행 국내 퇴직연금 제도는 계약형으로, 총 147조원(2016년말 기준) 중 은행과 보험사에 80%가 묶여있다. 이 때문에 전체 적립금 중 89%가 원리금 보장상품에 가입해있고, 수익률도 은행 예금 금리인 연 1.58% 수준에 그쳤다. 이런 이유로 김영주 고용노동부 장관 역시 지난해 공석에서 기금형 퇴직연금제의 필요성을 역설해왔다. 그러나 갑작스레 고용노동부가 법제처까지 통과한 법안을 직접 철회했다.

      업계에서는 의욕적으로 정부가 나서 추진하던 정책을 스스로 철회한 것이 결국 은행권 눈치를 본게 아니냐는 의구심까지 나왔다.  어쨌든 '준비부족'이라는 노동부의 철회 설명이 석연치 않았다는 것.

      기금형 퇴직연금을 통해 운용사를 통한 퇴직연금 운용이 활성화되면 자연스럽게 자본시장에도 자금이 흘러들게 된다. 한 자산운용사 운용역은 "정부 주도로 3000억원짜리 코스닥 전용 펀드를 만들어 투자를 집행하는 것보단, 기금형 퇴직연금제를 도입해 국민들도 자본시장 발전의 수혜를 입을 수 있도록하는 게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꼬집었다.

      한 증권사 IB 실무자는 "최근 정책의 추이를 보면 정부가 자본시장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다는 자기 확신 같은 것이 엿보인다"며 "부동산 가격이 정책의 반대로 가고 있듯이 자본시장에 대한 탁상공론식 규제도 결국 역풍이나 풍선효과를 불러올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