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배 탄 KT와 포스코, 기업 '가치'보다 중한 정권 '눈치'
입력 2018.04.19 07:00|수정 2018.04.20 12:23
    • 설마 했던 일이 현실이 됐다. 정권 교체 이후 끊임없이 제기됐던 포스코와 KT의 수장 교체 가능성 얘기다.

      18일 권오준 포스코 회장이 사의를 표명했다. 권 회장은 긴급 이사회를 마치고 "새로운 100년을 만들어가기 위해서 여러가지 변화 필요하다"며 "열정적이고 능력 있고 젊은 사람에게 회사의 경영을 넘기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며 사퇴 의사를 밝혔다. 임기가 아직 2년이 남아있지만, 박근혜 정부 시절 취임한 것에 대해 부담을 느끼고 사퇴를 결정한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공교롭게도 지난 17일 황창규 KT 회장은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피의자로 소환됐다. 황 회장은 2014∼2017년 KT 임직원을 동원해 19, 20대 국회의원 90여명에게 법인자금 약 4억3000만원을 개인 후원금인 것처럼 나눠 불법 정치자금을 제공한 혐의를 받고 있다. 본인의 연임과 국정감사 출석 제외 같은 대가성 자금인지가 수사 핵심이다. 황 회장에 대한 수사가 권 회장의 사임 결정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추측과 함께 KT의 수장 교체 가능성은 더 커졌다.

      두 회사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수장이 바뀌어야 하는 운명의 굴레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공식처럼 굳어지면서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회사의 움직임은 갈수록 소극적으로 바뀌고 있다.

      2011년 이석채 전 회장은 "KT는 더이상 통신회사가 아니다"라며 "2015년 비(非)통신 매출 18조원을 달성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이에 BC카드와 KT렌탈(현 롯데렌탈)을 인수하는 등 비통신 외형확장에 앞장 섰다. 정권이 바뀌자 이석채 전 회장은 전임 정권의 비호 아래 방만 경영을 한 주체로 낙인 찍혔고, 새로 취임한 삼성전자 출신의 황창규 회장은 '이석채 지우기'에 나섰다.

      황 회장은 본업인 통신업 강화를 주창하며 비주력사업에 대한 대대적인 구조조정에 들어갔고 그 결과 재무구조가 개선되는 효과를 보기도 했다. 그런데 연임에 성공하자 "2020년까지 비통신 매출 비중을 20~30%로 키우겠다"며 비통신 강화 카드를 다시 꺼내 들었다. 미래를 향한 구상이 6년만에 원점으로 돌아왔다. SK텔레콤, LG유플러스 등 재계 경쟁사들은 일찌감치 비통신 부문 강화를 위한 이미 발을 뗀 상황이다.

      포스코도 정확하게 같은 궤도 안에 있다. 정준양 전 회장은 포스코의 외연 확대를 주창하며 자원, 에너지 쪽으로 투자를 확대했다. 정 전 회장이 재임 기간 추진한 대형 인수합병(M&A)과 투자 규모는 7조원을 넘었다.

      정권이 바뀌자 역시나 정 전 회장은 방만 경영으로 포스코의 재무상태를 열악하게 만든 주범이 돼 있었다. 권오준 회장은 취임하면서 철강 본업을 강조하며 '정준양 지우기'에 들어갔다. 포스코특수강을 세아그룹에 매각하는 등 비주력 사업을 정리했고, 재무구조 개선을 최우선 과제로 내세웠다. 하지만 권 회장 역시 재임에 성공하자 달라졌다. 리튬·니켈 등 에너지 신소재 사업을 그룹의 미래 먹거리로 육성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하며 외연 확대를 다시 강조했다.

      이번 정부가 들어서면서 재계와 시장은 일말의 기대감을 갖기도 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그 역풍을 고스란히 맞는 KT와 포스코가 이번에는 그 적폐를 끊고 경영전략 연속성이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었다. 1년만에 상황은 뒤바뀌었고, 결과는 이번에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각 산업 트렌드의 변화 속도가 그 어느 때보다 빨라 기업의 경영 판단에 따라 존폐가 달라질 수 있는 요즘이다. 최고경영자의 선택과 책임 경영이 빛을 발해야 될 때다. 그 와중에 국내 최고 기업으로 분류되는 KT와 포스코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모든 경영 전략을 뒤엎어야 했다. "기업 가치보다 정권 눈치가 더 중요하다"는 또 다른 적폐를 만들고 있는 셈이다.

      국내기업에 투자하는 한 외국계은행 관계자는 "KT와 포스코는 사업성과는 별개로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재평가해야 하는, 정치 리스크가 큰 기업으로 분류될 수밖에 없다"며 "정부의 재벌 개혁 의지와는 반대로 경영 연속성 측면에서 SK텔레콤, 현대제철 등 재벌 기업들이 더 큰 점수를 받는다"라고 지적했다.

      다른 외국계 투자은행(IB) 관계자는 "정부의 지분도 없으면서 정권 교체 때마다 임기가 남아있는 CEO들을 교체하려는 압박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주주 가치 제고 목소리가 높아지는 분위기에서 KT와 포스코는 의도치 않게 역행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제 관심은 '누가 KT와 포스코의 새 수장이 될 수 있을까'로 옮겨지고 있다. 정치권의 압박이 커지면 커질수록 CEO 검증은 어려움을 겪게 되고, 그로 인한 경영 공백 상태가 장기화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새 CEO로 누가 오더라도 '황창규·권오준 지우기'는 시작될 것이다. 보신주의 성향은 강해질 수밖에 없다. "KT는 그냥 깔려 있는 통신망으로 먹고 사는 전화 회사로, 포스코는 철광석을 제련해 철을 만드는 제철소"로 결국 국내외 시장 경쟁에서 도태될 가능성만 키우는 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