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사는 브로커리지 안주·정부는 옛 NCR 고집…"골드만은 먼 얘기"
입력 2018.09.20 07:00|수정 2018.09.21 10:41
    초대형 IB 미래 불투명…자본 규모 경쟁 안 돼
    전문인력·해외투자 역량·글로벌 네트워크 부족
    눈앞의 수익에 목매느라 체질 개선에는 뒷짐

    정부, 규제 개혁은커녕 IB 육성 자체에 관심無
    "규모의 경제 감안, 지주사 중심 CIB 모델 적합"
    • 국내에서 초대형 투자은행이 성공적으로 안착하려면 일단 투자은행 업무(Investment Banking)에 대한 '인식 변화'가 전제돼야 한다. 즉 초대형 IB로 지정된 증권사들은 중소형 증권사들과 차별화해 고위험 고수익(High Risk, high return) 투자를 단행할 수 있는 체력과 자신감이 먼저라는 얘기다.

      금융당국 역시 IB산업을 육성하기로 했으면 그에 걸맞게 규제의 벽을 허물어야 한다.

      다만 현 시점에서 초대형 IB의 미래는 밝아 보이지 않는다. 일단 덩치(자본 규모)가 글로벌 경쟁사 대비 여전히 미약하다. 더 큰 문제는 리서치 및 리스크관리 능력 제고와 해외 네트워크 확대 등 체질 개선 역시 당장 수익성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소극적이다. 여기에 이번 정부는 금융을 산업 주체가 아닌 조력자로 인식하고 있어 금융규제 개혁 의지 자체가 약하다는 것도 문제다.

      1. 위탁매매 이익 나면 계약직부터 늘리면서 IB?…'임기 중 단기 성과'만 관심

      초대형 IB 라이선스를 갖춘 국내 대형증권사들은 올 상반기 수익 중 평균 20%를 위탁매매(브로커리지)에서 올렸다. 오래 전부터 '투자중개업자'로 성장해 온 국내 증권사들은 '천수답(天水畓)식 수익 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외치면서도, 실제로는 여전히 관행적 수익에 안주하고 있다는 평가다.

      국내 증권사의 최근 5년간 인력 및 지점 추이를 살펴보면 위탁매매 수수료 수익이 급등한 다음해는 예외없이 관련 인력과 조직이 크게 늘어났다. 반대로 위탁 수수료 수익이 줄어들면 여지없이 구조조정이 뒤따랐다. 올 상반기에도 반기 기준 사상 최대 위탁 수수료 수익을 올린 국내 증권사들은 지점과 인력을 다시 늘렸다.

      비대한 오프라인 영업 조직은 고비용 구조를 초래한다. 국내 '증권사'의 '투자은행' 진화를 막는 요소로 꼽히기도 한다. 수익구조가 들쭉날쭉해지면 리서치나 글로벌 등 중장기 수익 확대를 위한 투자가 어려워지는 까닭이다.

      실제로 국내 리서치센터 금융투자분석사(애널리스트) 수는 2013년 1386명에서 올 상반기 말 기준 1018명으로 5년새 27%나 줄어들었다. 4명 중 1명은 짐을 쌌다는 소리다. 2013년 말 기준 77곳이었던 해외지점·사무소·현지법인 수는 올 상반기 말 기준 62곳으로 줄었다. 분석 역량과 글로벌 네트워크 거점이 태부족인데 투자를 공격적으로 늘릴 수 있을리가 없다는 평가가 나오는 지점이다.

      그 새 인력 구조도 1년 단위로 단기 계약하는 계약직이 크게 늘었다. 2013년 17%였던 국내 증권사 계약직 비중은 올 상반기 말 기준 24%로 껑충 뛰었다.

      한 증권사 IB 담당 임원은 "회사에서는 '계약직은 고소득 전문가 집단'이라고 포장하지만, 1년 단위 수익에 따라 생사가 갈리는 계약직이 고위험 고수익의 책임투자를 할 수 있을 리가 없다"며 "저위험의 수수료 비즈니스를 매년 주어지는 수익 목표에 따라 넓게 펼치는 게 훨씬 생존에 유리하다"고 말했다.

      이렇다보니 증권사의 투자·IB역량은 점점 줄어들고, IB뱅커가 은행원이 돼가고 있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내부에서부터 나온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국내 증권가에 유입된 글로벌 IB 출신 리더들이나 실무자들은 지금 대부분 자취를 감췄다.

      다른 대형증권사 임원은 "지금 공격적으로 투자에 나설 수 있는 국내 증권사는 오너인 박현주 회장이 인사이트를 갖추고 전방위적·글로벌 투자를 독려하는 미래에셋대우 정도가 유일할 것"이라며 "단기 수익과 성과에 목을 매고 있는 대부분의 증권사 리더들은 새 비전을 제시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2. 투자은행에 '대출 안전성'을 요구하는 정부에 무슨 기대를? 

      증권업계의 항변도 만만치 않다. 정부 규제로 인해 근본적으로 '투자' 자체가 어렵다는 것이다. 따져보면 지나친 과거형 규제와 정부의 무관심이 핵심 원인 중 하나인 것도 사실이다.

      지난해 11월 5곳의 초대형IB가 정식으로 라이선스를 받고 출범한지 1달 뒤, 금융위원회의 민간자문기구인 금융행정혁신위원회는 '초대형IB가 정상적인 궤도에 오를 때까지 일반 은행 수준의 건전성 강화 조치가 필요하다'고 권고했다.

      이런 발상 자체가 초대형IB를 사실상 은행과 같은 선상으로 재단한 것이다.

      당시 금융행정혁신위원회의 위원장은 현 정부 실세 중 하나로 꼽히는 윤석헌 현 금융감독원장이다. 이는 현 정부가 금융산업을, 좁게는 투자은행을 바라보는 인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았다.

      현재 국내 IB의 적극적인 투자를 가로막고 있는 핵심 규제는 순자본비율(NCR) 규제와 레버리지비율 규제다. 현행 규제 아래서는 국내 증권사가 글로벌 IB로 진화하기 어렵다는 것이 업계의 중론이다. 그럼에도 이번 정부가 규제를 완화해줄 거라고 기대하는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 지난 2014년까지 국내 NCR 기준은 1997년 일본 금융청의 자기자본규제를 차용해 도입한 낡은 규제였다. 1억원의 위험자산 신규 투자를 위해선 자기자본을 5억원 늘려야 했다. 2016년 미국식으로 NCR 규제를 전면 개편했지만, '총위험액'이라는 일본식 기준을 남겨둔데다 레버리지비율 규제를 신규 도입하며 '이중 규제'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NCR 규제의 원산지인 미국에서는 증권사가 3가지 규제 방안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현행 국내 규제는 총부채에 기반한 최소자본금을 따지는 '표준방식'에 가깝다. 미국에서는 자기자본이 1000만달러(약 110억원) 미만인 증권사들이 주로 선택하는 기준이다. 이 기준을 국내에서는 자기자본이 8조원에 달하는 대형 증권사에까지 일괄 적용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자기자본이 1억달러(약 1100억원)만 넘어도 '총고객인출금'을 기반으로 하는 '대체방식'을 선택하는 비율이 월등히 커진다. 이 방식의 특징은 고객과 채권자에 대한 지급의무만 충족한다면 자산을 투자하는 데 큰 제약이 없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자기자본 5억달러(약 5500억원) 이상 지주사 구조의 초대형증권사는 '대체순자본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 투자 자산의 위험가중치를 규제기관이 정해주는 게 아니라, 자사의 내부모델에 따라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방식이다. 내부 리스크관리 역량을 갖춘 IB라면 자본규제의 영향을 최소화하며 투자를 집행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것이다.

      투자의 빗장을 풀어준 결과 2014년말 기준 미국에 기반을 둔 글로벌 투자은행들의 단순 레버리지 비율은 3000~4000%에 달했다. 국내 기준(1100%)의 3배가 넘는다. 이들 글로벌IB는 미국 증권위원회가 요구하는 최소자본금 대비 10조원 이상의 자본여력을 바탕으로 지금도 투자를 활발하게 집행하고 있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국내 증권사 자본건전성 규제는 IB 육성보다는 해당 증권사와 거래하는 고객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 훨씬 크다"며 "리테일(소매) 브로커리지가 주 업무인 증권사에는 강화된 기준을, 자본을 바탕으로 직접 투자와 IB를 통해 돈을 벌 증권사엔 완화된 기준을 적용하면 되는데 경직적으로 한 가지 잣대만 요구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현 정부의 정책 입안자들은 이 사항에 관심이 없다는 게 문제다. 초대형IB, 중소기업특화증권사 등 증권업 특성화·차별화 정책은 전부 전 정부에서 시작됐다. 초대형IB 인센티브의 핵심은 발행어음업이지만 심사 절차가 예상보다 엄격해지며 지금까지 인가를 받은 증권사는 2곳에 불과하다.

      다른 금융권 관계자는 "이번 정부에서는 'IB 육성'이라는 구호조차 내세우지 않고 있다"며 "금융소득 과세강화나 대주주 과세 정책 등으로 미뤄보면 증권업은 전통 제조업 노동자와 서민으로 구성된 현 정부의 주 지지층과 거리가 멀다고 판단한 것 같다"고 말했다.

      3. “한국선 골드만삭스 탄생 어렵다”…오히려 힘 받는 CIB 모델

      처음부터 ‘한국판 골드만삭스’는 탄생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20년전 외환위기, 10년전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쳐오면서 금융산업에 대한 이미지는 더 이상 나빠질 수 없게 됐다. 금융이 규제산업인 상황에서 탐욕의 상징이 된 ‘월스트리트(Wall Street)’를 목표로 삼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얘기다.

      시장 관계자들은 처음부터 한국형, 이른바 우리 금융실정에 맞는 투자은행 모델에 대한 고민을 먼저 했어야 한다고 전한다. 국내에서, 더 나아가 아시아 금융시장에서 국내 금융기관들이 어떤 IB 활동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냉정한 분석을 의미한다.

      금융당국의 공무원 입에서 나온 ‘한국판 골드만삭스’는 행정 편의주의적 발상이라는 지적이다.

      IB업계 관계자는 “IB도 각자가 잘 할 수 있는 분야를 키우고 금융당국은 이를 잘 도와주면 되는데 특정 기준을 정하고 그에 맞춰 할 수 있는 행위를 허용해준다는 발상 자체가 IB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며 “JP모건, 씨티그룹, 도이체방크, UBS가 될 수 있다는 다양성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현실적으로 초대형 IB 업무를 감당할 수 있는 건 20조~30조원의 자기자본을 보유한 금융지주사 정도다. 특정 계열사가 IB 업무를 전담하는 게 아닌, 지주사가 컨트롤타워를 맡고 전 계열사가 IB 사업에 뛰어드는 형태가 가장 적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러 계열사를 통해 다양한 심사능력, 네트워크, 전문인력을 활용할 수 있다.

      국내 증권사 관계자는 “NH투자증권과 KB증권이 초대형 IB로 지정되긴 했지만, 향후 유상증자 같은 자체 자본 확대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고 지주사와 교감없이 개별 사업을 추진할 수도 없는 게 현실”이라며 “결국 이들 증권사는 먹거리를 가져오는, 그룹 IB사업의 첨병 역할을 할 가능성이 더 크다”고 평가했다.

      보수적 경영으로 정평이 나있는 신한금융그룹의 변신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계열사 IB 조직을 한데 모은 GIB(Global Investment Banking)를 중심으로 공격적인 영업에 나서고 있다. KB금융그룹도 CIB 사업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는 기치 아래 2016년부터 계열사 협업을 통한 CIB 확대에 나서는 중이다. 국내 주요 시중은행들이 하반기 들어 해외IB 데스크 신설을 잇따라 예고하고 있는 것도 주목할 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