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페소에 내놔도 안 팔렸다는 한진중공업 수빅조선소
입력 2019.01.09 07:00|수정 2019.01.11 09:10
    조(兆)단위 투자에 '속도전' 강조 했지만
    첫 선박 인도後 10년 만에 쓰러진 수빅
    두테르테 취임, 수빅 열어보니 수천억 적자
    부채는 많고, 이익은 마이너스
    불투명한 업황에 매각도 실패
    현지화 실패도 한 몫…계약 조건 열어보면 새 국면
    • 한진중공업의 자회사 필리핀 수빅조선소(HHIC-Phil)가 기업회생절차에 돌입했다. 한진중공업이 2006년 야심차게 해외 진출한지 불과 12년만이다. 수빅조선소가 한진중공업의 주력 자회사였던 점을 고려하면 한진중공업에 부담이 전이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 조남호 회장, 조 단위 투자에 속도전 강조…첫 배 인도 10년 만에 쓰러져

      수빅조선소는 한진중공업이 지난 2006년 필리핀 수빅 경제자유구역에 건립한 자회사다. 수빅조선소는 2만TEU급 이상 컨테이선을 비롯해 중대형 상선 위주로 운영해 왔다. 건립 당시 조남호 한진중공업 회장(現 한진중공업홀딩스 회장)은 "속도가 시장을 지배한다"는 속도경영을 앞세우며 수빅조선소 조기 준공을 지시했다.

      조기 준공과 더불어 확장 계획도 밝히면서 애초 70만평 규모로 예정한 부지는 100만평 이상으로, 도크도 1기에서 2기로 늘렸다. 투자금도 당초 계획보다 약 3000억원 늘어난 1조원 수준이 됐다. 한진중공업은 당시 "속도경영의 일환으로 수빅조선소가 착공도 하기 전에 4300TEU 컨테이너선 4척을 수주하는 기록을 세웠다"며 대대적인 홍보에 나서기도 했다.

      한진중공업의 수빅조선소를 통한 도약의 꿈은 오래가지 않았다.

      조선업은 전세계적으로 장기불황에 접어들었고, 글로벌 업체들이 하나같이 수주절벽과 실적감소에 시달렸다. STX조선해양을 비롯해 전 세계 조선업을 이끌던 국내 조선사들이 쓰러졌고, 현재까지도 비교적 우량한 조선업체들도 경영난에 시달리고 있다.

      한진중공업과 수빅조선소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진중공업과 수빅조선소의 합산 신규선박(컨테이너, 유조선, 벌크선) 건조 매출액은 지난해 3분기 2700억원으로 전년(6736억원) 대비 절반에도 못 미쳤다. 수빅조선소는 지난 2016년 3560억원의 순손실을 기록한 데 이어서 2017년에도 2460억원의 손실을 기록했다. 수빅조선소의 공장 가동률(실적/연간생산능력)은 2016년 77.4%에서 지난해 3분기 28%으로 급감했다.

      이같은 상황이 지속하자 수빅조선소 사장으로 2016년 취임한 정광석 전 STX조선해양 대표(전 성동조선해양 대표)도 결국 물러났다.

      업계 한 관계자는 "STX와 성동조선 등 어려움을 겪어봤던 정 전 대표마저 수빅조선소 상황을 도저히 바꾸기 어렵다고 판단했다"며 "결국 1년이 채 안돼 회사를 떠난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 두테르테 대통령 취임, 수빅조선소 뚜껑 열어보니 수천억 적자

      수빅조선소가 쓰러진 데는 비단 장기불황에 빠진 조선 업황 만이 원인은 아니었다. 필리핀의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한진중공업의 현지화 전략 부재도 실패 요인으로 평가 받고 있다.

      한진중공업이 이제껏 수빅조선소에 투자한 자금은 약 1조5000억원 수준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경영난이 지속하자 수빅조선소는 필리핀 현지 은행으로부터 수천억원 대의 자금을 조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3분기 기준 수빅조선소의 부채총액은 9375억원이다. 이번 회생절차 신청도 과도한 차입금과 무관하지 않다는 평가를 받는다.

      부패척결을 앞세운 로드리고 두테르테(Rodrigo Duterte) 필리핀 대통령이 2016년 취임하자 필리핀 은행들의 대대적인 경영진 교체, 이에 따른 투자회사를 대상으로 감사가 진행됐다. 필리핀 정부 입장에선 현지 은행의 자금이 수빅조선소에 지원된 상황에서 수빅조선소의 경영에 문제가 많다고 판단, 부실기업으로 낙인 찍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한진중공업은 지난해 초부터 삼일회계법인을 주관사로 선정해 보유한 수빅조선소 지분 99% 중 일부 매각을 추진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한진중공업이 필리핀 정부를 상대로 "수빅조선소를 1페소(필리핀 최소 통화 단위)에 사가라는 제안을 했지만 거절당했다"는 것으로 알려지기도 할 정도로 경영난에 빠진 수빅조선소 매각 작업은 순탄하지 않았다.

      업계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한진중공업이 1페소에 매각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부채만 수천억원에 이익도 못 내는 회사를 누가 사갈 수 있었겠냐"며 "단순히 부채 문제가 아니라 선박을 인도한 후 보증(개런티)을 해줘야 하는 문제도 있는데 현재 자금 사정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다"고 했다.

      ◇ 값싼 인건비만 믿고 나갔다가…"숙련공은 떠나고 관리는 안되고"

      한진중공업이 필리핀 진출을 서두른 것은 비교적 저렴한 인건비 때문이다. 직원들의 전문기술이 필요한 조선업은 숙련공들이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현지화 전략에 실패하며 인력확보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조선업계에선 제대로 숙련된 인력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선 최소 5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다만 필리핀 현지의 특성상 숙련공으로 키워내기까지 시일이 더 많이 걸리고, 일이 조금 손에 익었다 싶으면 더 좋은 조건을 찾아 떠나는 경우도 많다는 지적도 있다. 특히 영어에 능통한 현지 인력이 많기 때문에 이직이 보다 수월하다는 점도 작용한다.

      조선업계 한 관계자는 "필리핀 정부에서 현지 인력들에 대해 최대 10년의 고용보장 기간을 준 것으로 알려줬을 정도로 조선소는 안정된 직장이지만 숙련공이 부족하다 보니 더 좋은 조건만 있으면 금방 떠나는 게 현실이다"며 "특히 한진중공업 보다 임금이 높은 싱가포르 업체나 중동의 건설업체로의 이탈이 많은 편이다"고 했다.

      고급 인력이 부족한 상황이지만 오히려 숙련공이 더 많이 필요한 대형선박에 집중하다 보니 선박의 품질 문제, 관리문제가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다. 실제로 국내 조선사들이 해외 업체에 비해 가격 경쟁력은 다소 떨어지지만 글로벌 기업으로 인정받는 이유 역시 숙련된 인력들이 만든 '고품질 선박'이라는 인식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조선업계 한 관계자는 "수빅조선소는 사실 배를 짓고 나면 관리가 안돼 돈이 더 들어가는 구조로 보인다"며 "한진중공업이 대형 선박 건조와 더불어 수빅조선소를 홍보 했지만 사실상 알맹이는 없는 회사였다"고 지적했다.

      ◇ 한진중공업 본사에 부담 전이 가능성은?

      수빅조선소가 회생절차에 돌입하면서 이제 관심은 한진중공업 본사에 쏠리고 있다. 한진중공업은 최근 채권은행과 자율협약 기간을 연장했는데 추가적인 자구안 이행 압박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평가다.

      과거 STX조선해양의 전례가 있었던 만큼 한진중공업에 대한 산업은행(주채권은행)의 지원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는 분석이다.

      수빅조선소가 회생절차를 진행하면서 드러나게 될 '수빅조선소-선주' 계약상 한진중공업의 지급보증 여부, 또는 국내 채권은행 개입 여부에 따라 단순히 수빅조선소 회생절차 문제에 그치지 않을 것이란 지적도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STX대련이 회생절차에 돌입한 이후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아 STX조선해양이 법정관리에 들어간 전례가 있기 때문에 또다시 산업은행이 조선소에 지원을 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본다"며 "현재까진 필리핀 현지 법인이 법정관리에 돌입한 수준 정도로 보이지만 향후 수빅조선소의 세부 계약 조건들을 열어보기 전까진 한진중공업 및 채권단에 미치는 영향의 유무를 단정지을 순 없다"고 했다.

      신용평가사 관계자는 "수빅조선소 사례는 지난 수 년간 조선소가 쓰러진 전형적인 케이스"라며 "이번 수빅조선소 사태의 여파가 한진중공업까지 미칠지는 지켜봐야 하겠지만 가능성을 '제로'로 볼 수는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