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vest Column]
"그런 작은 일 하나 못 풀고..." 국민은행의 자가당착
이재영 기업금융부 차장 | leejy@chosun.com | 2019.01.10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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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쪼잔한 것 하나 못 풀고...대체 국민은행 경영진은 무얼 하고 있었답니까?"

8일 KB국민은행 총파업을 지켜본 한 전직 은행장의 일갈이다.

허인 행장을 비롯한 KB국민은행 경영진 입장에서는 볼멘소리를 낼 수도 있다. 허 행장은 6일 새벽 4시까지 직접 교섭에 응했다. 밤새 대기하던 실무진은 바통을 이어받아 새벽 6시까지 협상의 끈을 놓지 않았다. 7일 파업 전야제 현장에서는 초조한 표정의 이기노 국민은행 HR본부장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은행장은 노력이 아닌, 결과물을 보여줘야 하는 자리다. 협상의 결과는 19년만의 총파업이었다. 은행과 노동조합, 양측에 쌓인 감정의 골만 3000만 고객들에게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은행은 자본과 인재로 영업을 하는 기업이다. 자본은 은행장과 경영진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자원이다. 남은 건 인재다. 인재를 얼마나 잘 관리하고 적절한 자극과 보상으로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느냐가 은행 경영의 핵심이라는 건 금융권 경영진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허 행장의 리더십이 도마 위에 오르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허 행장은 취임 일성으로 '건전하고 발전적인 노사 관계의 파트너인 박홍배 위원장님'을 언급했다. 임금단일협상이 파국으로 치닫던 올해 초 신년사에서도 '미래지향적인 노사관계를 함께 만들어나가는 것'을 올해의 실천과제로 내세웠다.

결과적으로 이 말은 자가당착(自家撞着)이 됐다. 평사원이자 노조위원장 출신인 허 행장은 거꾸로 최악의 노사관계에 직면하게 됐다.

대표적 장면이 올해 초 KB국민은행 임원진 54명의 조건부 사표 일괄 제출이다. 이를 두고 금융권에서는 조소를 보냈다. 한 경쟁사 관계자는 "행장과 경영진 그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대외 연출"이라고 폄하했다.

실제로 은행권에서는 이에 대해 "은행 임원들이 '윗선' 눈치만 보고 있다", "은행장이 수하 임원들에게 책임을 미루는 듯한 메세지를 안팎에 줬다"는 평가가 쏟아졌다. 일각에서는 결국 사태가 파업에 이른만큼 '진정성'을 증명하기 위해 실제로 사표를 수리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도 나온다.

KB금융지주의 주주인 한 연기금 관계자는 "협상 과정에서 얼마나 노력을 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협상이 잘 끝나도록 사전에 판을 잘 짜두는 게 훨씬 중요한 것 아니냐"며 "허 행장 취임 후 노조위원장과 마주앉아 담소를 나누는 걸 보고 기대를 좀 가졌는데 결국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다"고 말했다.

KB국민은행 노조와 회사는 2016년 노조위원장 선거 개입 의혹으로 한 차례 파국에 다가섰었다. 이후 2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지만 회사는 직원들의 신뢰를 회복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열흘 전 총파업에 대한 KB국민은행 조합원 찬반 투표에서 찬성률이 96.01%에 달한 건 경영진보단 노조에 기운 직원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결국 세간의 화살은 허 행장을 넘어 윤종규 KB금융지주 회장을 향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윤 회장은 2016년 당시 행장을 겸임하고 있었다. 4년째 조직을 이끌며 재무 전략에 기반한 양적 성장을 통해 리딩금융그룹 탈환하는 공을 세웠지만, 건전한 기업문화를 만드는 덴 실패한 셈이다. 이제 은행권 노조 중에서 '강성노조'라고 부를 수 있는 곳은 KB국민은행 한 곳 정도다.

물론 노조도 이번 파업을 통해 잃은 것이 많다. 2014년 이후 입사한 신입 행원만 적용받고 있는 '페이밴드'와 2차 정규직(옛 무기계약직) 호봉 인정 등 '약자'에 대한 처우개선을 전면에 내세웠지만, 여론의 공감을 얻는 데엔 실패했다. 오히려 5000여명이 파업에 동참하고도 일선 창구에서 큰 혼란이 없었다는 점에서 추후 인력 구조조정의 명분만 준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해 3월 노조 추천 사외이사 선임 당시 직간접적으로 받았던 정부·정치권의 지원도 이번 파업에서는 얻어내지 못했다.

김용범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은 9일 '확대 위기관리협의회'에서 "파업으로 인해 그동안 쌓아온 은행의 신뢰와 평판이 훼손되어 궁극적으로 주주, 경영진, 근로자 모두에게 손실을 초래한다"며 "은행은 경제활동을 매개하는 국민경제의 핵심 인프라라는 측면에서 국가적 손실도 큰 사안"이라고 말했다. 사실상 파업을 반대하며 회사의 입장에 힘을 실어주는 발언으로 해석된다.

노조의 요구사항은 단기적(성과급)으로는 물론, 중장기적(2차 정규직 호봉, 페이밴드 폐지)으로 인건비를 크게 늘릴 수 있다는 점에서 '주주 권리 침해'라는 지적도 제기된다. KB국민은행은 윤종규 회장 취임 이전 만성적 고비용 구조로 인해 경쟁사 대비 성장에 한계가 있었고, KB금융지주 주가 역시 상당기간 저평가된 상태로 거래됐었다.

노조는 일단 9일 현장에 복귀했다. 그러나 이후 협상에 진전이 없다면 설 연휴를 앞두고 금융거래가 몰리는 이달 31일과 2월1일 이틀간 파업하겠다는 계획이다.

[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2019년 01월 09일 15:01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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