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떠오르는 회사채 시장…곳곳에 '신용 이벤트' 암초
입력 2019.04.04 07:00|수정 2019.04.05 09:59
    • 자본시장에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회사채가 오랜만에 큰 관심을 받고 있다. LG화학, CJ제일제당, 현대제철 등 국내 내로라하는 그룹 주력 계열사들이 회사채 시장에서 잇따라 대규모 자금을 조달했다. 우량기업의 수요예측 흥행 열기는 비우량기업으로도 이어졌다. 절대적 비중은 작지만 유의미한 발행들이 이어졌다. 자금조달 창구로써 기업들이 은행 대신 채권시장으로 몰리자 투자은행(IB)들의 주관 경쟁도 다시 뜨거워졌다.

      항상 그래왔듯 이 열기가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기본적으로 ‘상고하저’ 시장이지만 모든 산업의 전망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시설투자 수요는 예년 같지 않다. 무엇보다 비우량기업에서 불거질 수 있는 크레디트(Credit) 이슈는 비단 회사채 발행시장뿐 아니라 자본시장 전체의 경색을 가져올 수도 있다.

      # 10년만에 순발행 최고치…연초 뜨거운 DCM

      채권자본시장(DCM)이 다시 한 번 주목을 받고 있다. 은행 기업대출 금리 상승 기조 속에서 채권 발행 여건이 개선되자 우량기업을 중심으로 대규모 회사채 발행이 줄을 이었다.

    • 전체 발행액에서 차환발행액을 제외한 순발행액이 증가 추세를 보이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1∼2월 회사채 순발행액은 5조원을 기록했다. 2009년 1∼2월(10조5000억원) 이후 최대치다. 2009년에는 정부가 금융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10조원 규모의 채권시장안정펀드를 조성, 비우량 회사채 등을 사들이면서 회사채 순발행액이 일시적으로 급증했다. 반면 올해는 AA급 우량기업들을 중심으로 자발적 발행이 주를 이뤘다.

      인베스트조선이 집계한 1분기 DCM 리그테이블을 보면 대규모 발행 건수가 많다. 그 중에서도 주인공을 꼽으라면 단연 LG화학이다. 지난해 국내 기업으로는 처음으로 1조원 규모의 무보증공모사채를 발행했는데 올해도 재차 1조원을 회사채 시장에서 조달했다.

      LG화학은 당초 5000억원 규모의 회사채 발행 여부를 두고 기관투자가를 상대로 수요예측에 나섰다. 그 결과 2조6400억원의 자금이 몰렸고, 경쟁률은 5.28대 1를 기록했다. 이에 회사채 발행 규모를 두 배 증액한 것이다. 이는 국내에 회사채 발행 수요예측 제도가 도입된 2012년 이후 최대다.

      LG화학뿐만이 아니다. CJ제일제당과 현대제철은 각각 7000억원을, SK인천석유화학은 6000억원을 채권 시장에서 조달했다. 그밖에 KT, 한국해양진흥공사, GS칼텍스, LG유플러스, 미래에셋대우, LG전자, SK에너지는 각각 5000억원어치의 회사채를 발행했다. 1분기에만 5000억원 이상 발행 기업이 11곳에 달한다.

      기업집단별로 보면 SK그룹이 2조7700억원으로 가장 많은 자금을 조달했고, LG그룹도 그에 못지 않은 2조3900억원어치의 회사채를 발행했다. 현대자동차그룹은 1조300억원, 롯데그룹은 9500억원, CJ그룹은 8000억원으로 뒤를 이었다.

      조달 목적을 살펴보면 차환 외에도 시설투자, 지분취득, 운영자금 등 기업의 직접적 자금 소요에 대응하는 모습이 뚜렷하다. 예를 들면 LG화학과 SK실트론, 롯데로지스틱스는 시설투자, CJ제일제당은 쉬완스 인수자금을 채권 시장에서 마련했다.

    • 무엇보다 발행 여건이 크게 개선된 점이 기업들을 채권시장으로 끌어당겼다. 지난해 10월 2.45%였던 3년 만기 회사채(AA-) 금리가 올 3월에는 2.10%대까지 하락했다. 이에 비해 예금은행의 대기업 대출금리는 신규취급액 기준으로 지난해 9월 3.21% 이후 지속해서 올라 올해 1월 3.58%까지 상승했다. 회사채(AA-) 금리와 대기업 대출금리 차이는 지난해 10월 0.97%포인트에서 올해 1월 1.32%포인트까지 확대됐다.

      수요예측을 통해 기관을 중심으로 한 우량기업의 장기물에 대한 투자자들의 충분한 수요를 확인할 수 있었다. 연초 자금조달 소요가 크게 늘어난 우량기업들은 조달비용을 대폭 낮출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하자 대대적인 설비투자, 대규모 인수합병(M&A)에 필요한 자금 상당부분을 회사채 시장에서 조달했다.

      # 은행대신 채권시장 찾는 기업들…단골확보 바쁜 IB들

      2019년 회사채 시장은 의례적인 연초 효과를 뛰어넘어 뜨겁다. 특히 최근 은행 대출금리의 상승세 지속은 대기업들의 대출 창구를 은행에서 채권 시장으로 바꾸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감독당국은 은행들의 가계대출 감소, 기업대출 증가를 꾀하고 있다. 이를 위해 내년부터 가계대출 취급에 불이익일 주는 새 예대율(예금 대비 대출금 비율) 산정 방식 적용을 천명했다. 은행들은 수신성 조달을 늘리기 위해 예금금리를 올리고 이에 맞춰 대출금리도 상승했다.

      반면 채권시장에는 우량 회사채 수요가 대기 중이다. 특히 장기물에 대한 선호 현상이 뚜렷하다. 수요예측에서도 대부분 만기 5년 이상의 장기물에 자금이 몰렸다.

      채권시장 관계자는 “단순 차환발행이 아닌 시설자금과 인수자금을 마련하려는 기업들은 장기물을 발행하려고 하는데 이는 기관투자가들의 투자 수요와 일맥상통해 연초 자금들이 채권 시장으로 몰려들어왔다”며 “대기업 입장에선 은행은 돈을 빌리는 곳이 아닌, 맡기는 금고가 돼가고 있다”고 평했다.

      증권사들의 회사채 주관 경쟁도 다시 불 붙었다. 국내 인수합병(M&A), 기업공개(IPO)가 예전만큼 활발히 이뤄지지 않다보니 국내 투자은행(IB)들이 대기업과의 접점을 넓힐 수 있는 루트는 회사채 주관으로 좁아졌다. 은행들의 대(對)기업 영업력이 약화한 점도 증권사들에 기회다.

    • KB증권이 몇 년간 회사채 주관 1위 자리를 수성하고 있지만 NH투자증권도 올해만큼은 뒤질세라 경쟁에 불을 지폈다. 한국투자증권, 미래에셋대우, 신한금융투자가 그 뒤를 잇고 있는 가운데 SK그룹에서 계열분리 된 SK증권의 선전도 눈에 띈다.

      단순히 주관 금액이 많다는 게 중요하진 않다. 특정 기업을 내 고객으로 만들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해진 시점이다.

      회사채 시장 최고 큰 손인 SK그룹은 NH투자증권과 KB증권에 나란히 일감을 맡겼다. 중형 증권사 중에선 SK증권만 주관사로 이름을 올렸다. 과거 범LG 계열 증권사들에 기회가 많이 주어졌던 LG그룹은 말 그대로 IB들의 각축전을 벌이는 곳으로 바뀌었다. 현재까진 한국투자증권, KB증권, 미래에셋대우가 주도권 경쟁 중이며 NH투자증권도 기회를 노리고 있다. 현대자동차그룹과 롯데그룹, 한화그룹 딜(Deal)에는 삼성증권을 제외한 초대형 IB 4곳이 모두 참여했다.

    • 증권사 DCM 관계자는 “신용도가 우량한 기업의 대규모 발행 건을 살펴보면 복수의 대표주관사들이 이름을 올리는 것이 트렌드”라며 “과거에는 특정 기업은 특정 증권사가 담당하는 사례가 많았지만 회사채 발행이 기업대출 수준으로 일상화하면서 화제가 된 딜에 참여하지 못하는 게 더 화제가 된다”고 설명했다.

      단독대표주관을 맡는 사례도 있다. SK인천석유화학(6000억원), 한국해양진흥공사(5000억원), SK텔레콤(4000억원), 현대오일뱅크(2000억원), 대상(1900억원), 한솔제지(1000억원)은 KB증권이 맡았다. SK에너지(5000억원), SK브로드밴드(2100억원) , LS전선(2000억원), 대림코퍼레이션(1000억원)은 NH투자증권이 단독대표주관사였다. 롯데로지스틱스(1000억원)은 신한금융투자가, 태영건설(1000억원)은 한국투자증권이, 한국콜마(1000억원)는 미래에셋대우가 전담했다. 딜을 단독 주관한 IB 입장에선 이를 기반으로 단골을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뜨거운 DCM의 이면…리스크는 커졌다

      채권시장에 자금이 넘친다는 것, 기업들에는 희소식이다. 우량기업들만 혜택을 본 건 아니다. AA급 이상 우량기업 회사채에 쏠린 기관 자금은 AA급 이하로도 넘어갔다.

      리테일 수요도 더해지면서 A-급 이하 비우량 회사채 발행도 이뤄졌다. 태영건설(A-), 한화건설(BBB+), 한신공영(BBB) 등 비우량 건설사들 채권도 발행됐다. 두산인프라코어(BBB)도 두산건설발 그룹 유동성 리스크가 부각된 상황에서 공모회사채 발행에 성공했다. 약 9000억원어치 발행된 A-급 이하 채권에서 1000억원 이상 발행된 건 수는 5건에 달한다. 등급과는 무관하게 높은 수요를 보이며 대부분 증액 발행에 성공한 모습이다

      물론 순발행 증가의 대부분은 AA등급 이상의 우량 회사채에 한정돼 있다. 비우량 회사채 발행도 전년에 비해 증가했지만 전체 파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미미하다. 그래도 작년말에 비해 비우량 회사채의 신용스프레드가 축소돼 발행 여건이 개선된 것만큼은 사실이다. 회사채 발행 시장이 강세를 지속할 지는 비우량 회사채 발행 움직임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기업들이 조달 금리가 싼 회사채 발행으로 몰리면서 회사채 접근성이 떨어지는 중소기업은 은행 대출이 꾸준히 증가했다.

      현 시점에서 대기업의 시장자금 의존도가 커지는 것을 긍정적으로만 보긴 어렵다. 시장 전반에서 비우량기업 관련 회사채로 인한 균열이 속속 발견되고 있다.

      1분기가 끝나기 직전 아시아나항공의 감사의견 ‘한정’ 판정이 크레디트 시장의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이후 ‘적정’ 의견을 다시 받았지만 BBB-에 ‘하향검토’가 붙은 신용등급이 제자리를 찾을지는 확실한 수 없어 자산유동화증권(ABS) 등 기한이익 상실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다. 아시아나항공 ABS는 고수익을 노린 리테일 투자자들에게 상당수 팔렸다. 과거 동양그룹 기업어음(CP) 사태와 비교된다.

      투자은행(IB) 업계 관계자는 “대주주 지원여력이 없는 아시아나항공은 은행권 대출과 공모회사채 발행도 막혀 CP나 사모채, 유동화 등으로 시장 차입을 확대했다”며 “아시아나항공의 신용등급이 투기등급으로 떨어질 경우 시장에 폭탄이 던져지는 꼴이고 리테일 시장에서 시작된 경색이 회사채 시장, 더 나아가 기업대출 시장으로 확산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초우량 기업들은 타격을 받을 가능성이 없다. 상위 그룹의 현금보유액은 역대 최대 규모를 기록 중이고 이미 다양한 자금조달 루트를 갖추고 있다. 여차하면 국내외 재무적투자자(FI)로부터 자금을 유치하면 된다.

      하지만 그런 경지에 오른 기업은 극소수다. CP 등의 단기차입금을 장기 회사채로 전환하려는 수요, 비우호적인 경영환경에 대응하기 위한 재무적 버퍼 확보가 필요한 기업들에 언제든지 불똥이 튈 수 있는 상황이다.

      1분기 회사채 발행 시장이 뜨거웠지만 올 한해로 놓고 보면 설비투자 규모가 예년만 못해 작년과 유사하거나 더 작아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금호아시아나그룹, 두산그룹에서 불거질 수 있는 신용 이벤트는 올해 DCM에서 가장 중요한 변수가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