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 과감한 투자에…신용등급 평가서 '차입금 상환능력' 방점
입력 2019.05.23 07:00|수정 2019.05.24 10:13
    주력사업 수익성 저하 속 투자 활기
    금융부채도 덩달아 늘어나는 추세

    신평사, 규모보다 상환 능력 초점
    등급변동 요인, 순차입금 지표 활용
    신용도 개선은 더 어려워질 듯
    • 국내 기업들의 사업 포트폴리오 조정이 한창이다. 비주력 사업은 구조조정을 하거나 주력 사업의 수익성이 떨어지면 새로운 먹거리에 과감히 투자를 늘리는 모습이다. 그 과정에서 금융 부채도 증가 추세다. 다행히 시장에 크레딧물 수요가 높아 조달 금리는 높지 않지만 차입금이 늘어난 만큼 신용도에 대한 하향 압박도 조금씩 커지고 있다.

      기업들의 투자 확대 추세가 이어지면서 신용평가사들의 평가 요소도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차입금의 규모도 규모지만, 기업들이 이를 제대로 관리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순차입금의 만기가 돌아왔을 때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는 수익창출능력을 갖췄는지가 등급변동 주요 요인으로 떠올랐다.

      과거엔 전반적인 레버리지 수준을 나타내는 부채비율이 주요 지표로 활용됐다. 총차입금이 얼마인지, 보유 현금은 얼마인지, 추가로 유동성을 확충할 수 있는 자산이 있는지가 중요했다. 기업들의 신규 투자가 확대됐고 그 추세가 이어지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시장 환경이 급변하면서 만약에 대비해 보유 현금은 사실상 쓰기 어려워졌다. 불필요한 자산을 처리해 투자 자산으로 활용하거나 시장 유동성을 활용해 외부 차입을 크게 늘렸다. 그렇게 투자한 결과가 긍정적일지도 확신할 수 없다.

      신용평가사들도 시장 환경 및 기업 재무전략 변화에 맞춰 신용도 방향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등급변동요인을 변경하는 작업들을 개별적으로 진행 중이다.

      전기차 배터리를 주력 사업으로 정한 LG화학과 삼성SDI의 등급변동 요인을 조정한 한국기업평가 사례의 경우. 한기평은 이전까지 영업부채를 포함한 전반적인 레버리지 수준을 나타내는 부채비율 지표를 LG화학의 등급변동 주요 요인으로 판단했다. 과거 보수적인 투자전략으로 설비투자 부담을 자체적으로 충당하는 영업현금흐름 구조였고, 풍부한 현금성자산을 보유해 금융부채 대비 영업부채 비중이 높은 부채구조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투자 전략 변경 여부와 전반적인 레버리지 수준에 대한 모니터링 지표로 부채비율을 적용해 왔다.

      그런데 LG화학의 재무 정책이 바뀌었다. 시장 지위를 강화하고 기수주 물량을 원활히 생산하기 위해 전지부문의 투자를 확대했다. 회사는 올해 이후에도 투자를 지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기평은 신규 투자 부담이 확대됨에 따라 금융부채 비중이 빠른 속도로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다. 또한 주력 사업의 수익성 저하 가능성이 있어 전반적인 레버리지 수준보다 영업현금창출에 근거한 차입금 상환능력에 초점을 둘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LG화학의 재무안정성 판단에서 기존 부채비율 지표 대신 순차입금/상각전영업이익(EBITDA) 지표를 사용하기로 했다.

      한기평은 삼성SDI에 대해서도 이전까진 수익성 저하 시기, 충분한 재무완충력 확보 여부를 신용등급을 지지하는 주요 요소로 판단했고, 이를 측정하기 위한 지표로 부채비율을 주요 등급변동 요인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삼성SDI가 성장성이 높은 전지사업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확대하면서 영업실적 또한 개선되고 있어, 기존 지표의 등급설명력이 약화된 것으로 판단했다. 이에 본원적인 현금창출력에 근거한 차입금 상환능력에 초점을 둔 순차입금/EBITDA 지표로 등급변동 요인을 변경했다고 밝혔다. 또한 증가된 투자소요를 자체적으로 충당하기 위한 수익성 창출능력이 더 중요해진 만큼 하향변동 요인 중 기존의 EBITDA 마진 지표를 강화했다고 덧붙였다.

      한국신용평가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향후 성장동력 확보를 위한 투자의 절대적인 규모와 투자의 회수가능성 등이 모두 고려될 수 있는 재무 커버리지 지표가 신용도 변화를 가늠하는데 더욱 적정한 지표라는 판단이다. 이에 한신평은 삼성SDI의 신용등급 하향 가능성 확대 조건 중 정량지표를 기존 ‘연결기준 순차입금의존도 3% 초과가 지속될 경우’에서 ‘연결기준 순차입금/EBITDA 지표 2.5배 초과가 지속될 경우’로 변경했다.

      SK하이닉스의 경우 이전까진 시설투자 규모를 현금창출능력이 받쳐줄 수 있느냐, 즉 투자 효율성이 등급변동 주요 요인이었다면 이젠 본원적인 현금창출력에 근거한 차입금 상환능력에 초점을 둬야 한다고 진단했다. 이에 한기평은 SK하이닉스의 등급변동 요인으로 순차입금/EBITDA 지표로 변경했다.

      물론 모든 산업, 모든 기업이 여기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등급변동 요인은 등급 자체에 영향을 미치는 장기적 평가 요소가 아닌, 단기적 위험 요소라는 점도 이해해야 한다. LG전자처럼 하향 요인이 순차입금/EBITDA 지표에서 차입금 의존도로 바뀐 경우도 있다. 신규 투자에 따른 재무부담 확대는 즉각적으로 나타나지만 투자 성과 기여는 중기적으로 발현된다. LG전자의 경우 투자 지출에 대한 재무 레버리지 상승을 적절하게 제어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순차입금/EBITDA 지표 같은 커버리지 지표는 앞으로 활용도가 더 높아질 것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신규 투자가 일상이 되고 그 투자 효과를 장담할 수 없는 산업 환경이 고착화하면 최고경영자의 사업 및 재무 전략을 평가할 수 있는 객관적 지표는 이만한 게 없다는 것이다.

      크레딧업계 관계자는 “박삼구 전 회장이 아시아나항공 경영권을 포기하게 된 것도, 두산그룹의 유동성 위기기 끊이지 않는 것도 두 그룹의 외형 확장 기조 속에서 시장 환경이 급변했고 이 과정에서 차입금 관리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며 “주가 못지 않게 신용등급도 최고경영자 또는 그룹 총수의 자질을 확인하는 지표가 돼가고 있다”고 말했다.

      신용등급 관리 차원에서 최고경영자는 외부 차입을 크게 늘릴 계획이라면 그만한 투자 효과를 거둘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실한 판단이 중요하다. 신규 사업 투자라면 투자 효과가 나타날 때까지 기존 사업에서 수익성을 어떻게 끌어올릴 것인지 플랜도 준비해야 한다. 앞으로 신용도 개선은 더 어려워질 것이라는 얘기와 다를 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