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이 차린 '투자 밥상'에 '숟가락'만 얹는 정부
입력 2019.05.23 07:00|수정 2019.05.24 10:14
    삼성전자ㆍSKㆍ현대자동차ㆍ롯데 등
    대기업이 투자ㆍ고용에 외교사절까지

    중소기업 정부 표방했지만 지원 부족
    정부는 운만 띄우고 대기업 전략 편승
    대규모 투자 실익 없이 실행 부담은 커
    • 정부는 올해 들어 대기업의 역할을 강조하며 힘을 실어주고 있다. 그러나 정책 방향을 설정하고 그에 따른 지원을 하기 보다는 화두를 먼저 던지고 해결책을 바라거나 기업들이 거둔 성과에 슬며시 올라타는 경우가 많다. 정부 입장에선 '책임'은 최대한 줄이면서 '공'은 공대로 누릴 수 있지만 정책의 연속성은 기대하기 어렵다.

      부담은 결국 기업들에게 전가된다. 정부가 바라보는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는 것도, 그 이후의 변동성을 감내하는 것도 모두 대기업의 몫이다. 정부의 바람을 무시하려니 칼 끝이 두렵고 온전히 수용하자니 얻을 것이 많지 않다. 정부가 생색내기에 열을 올리는 사이 국가 경제 체력이 악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대기업은 만능 해결사?…숟가락 얹는 정부

      올해 초 청와대 산책에선 메모리 산업과 관련된 대화가 오갔다. 문재인 대통령이 비메모리 반도체 진출을 묻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새로운 시도’가 필요하다며 긍정의 뜻을 내비쳤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반도체 경기 우려에 대해 "수요는 늘고 있다"고 답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이후 나란히 대규모 투자 계획을 내놨다. 삼성전자는 시스템 반도체 연구개발(R&D) 및 생산시설 확충에 133조원을, SK하이닉스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부지 조성 후 120조원을 쏟기로 했다. 대규모 고용 계획도 더했다.

      두 회사 모두 메모리 반도체 싸이클이 하향 국면에 접어들면서 변화가 필요하던 차였다. 시기적으론 정부의 의지에 화답한 모양새가 됐다. 정부는 문 대통령의 삼성전자 방문에 맞춰 2015년 중단했던 시스템 반도체 육성 정책을 다시 꺼내 들었다.

    • 셀트리온그룹은 바이오와 화학합성의약품 사업 등에 40조원을 투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11만개 일자리 창출 효과를 기대했다. 서정진 회장은 청와대 산책 기업인 중 한 명이다. '바이오헬스'는 시스템 반도체, 미래차와 함께 정부 3대 중점 육성산업 중 하나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올해 초 광주광역시와 ‘광주형 일자리’ 협상안을 타결했다. 상반기 중 법인 설립을 목표하고 있다. 사회적 합의를 통해 적정임금을 도출하되 부족분은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보전해주는 개념이다.

      광주형 일자리는 광주시가 자동차 생산 합작법인 설립을 추진하자 현대차가 참여 의사를 밝힌 형태로 진행됐다. 생산 단가를 ‘기업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낮추는' 효과가 기대되지만 실질은 ‘일자리 정부의 호남 배려'란 평가가 많다. 2014년부터 논의됐으나 진척이 없던 사업을 유일한 적임자인 현대차가 나서서 해결한 셈이다. 대통령은 ‘혁신적 포용 국가로 가는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13일(현지 시간) 백악관에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면담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루이지애나에 31억달러(약 3조7000억원)를 투자해 수 천 개의 일자리를 만들었다며 높이 평가했다. 불과 며칠 전 우리나라를 꼭 집어 ‘미국을 좋아하지 않는 나라’라고 했지만 이번엔 ‘훌륭한 파트너’라고 칭했다. 경색되던 한미 관계에 온기를 넣을 계기를 마련했다.

      정부는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남미를 순방하던 이낙연 국무총리가 루이지애나 공장 준공식에 참석해 ‘한미 동맹’을 강조했다. 14일엔 홍남기 경제부총리가 나서 다음달 중 석유화학 업종 애로사항 해소 및 차세대 디스플레이 육성 방안을 내놓기로 했다.

      대기업들은 정부의 다른 고민들도 해결해가는 모습이다. 오랜 골칫거리였던 대우조선해양은 현대중공업그룹이 받아가기로 했다. 아시아나항공은 ‘국내의 자본력 있는 대기업’만 인수할 수 있다.

      ◇中企 정부?…돌고 돌아 대기업으로

      문재인 정부는 중소기업 정부를 표방했지만 정책 지원은 부족했다. 소득주도성장 명분 아래 52시간제 도입, 최저임금 인상 등을 밀어붙이는 사이 중소기업의 활력은 떨어졌다. 15일 통계청의 발표는 전날 대통령의 “우리 경제가 성공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발언을 무색케 했다. 중소기업에 힘을 실은들 얻을 것이 많지 않다.

      정부는 이제까지 지배구조 개선 명분을 무기로 대기업을 압박해왔다. 당장의 성과를 내기 위해선 여력이 있는 대기업의 조력이 필수다. 특히 올해 들어 대기업 수장들에 규제 혁신을 약속하며 고용과 투자를 늘려달라고 독려하고 있다.

      그렇다고 정부가 직접 앞장 서는 것은 아니다. 집권 2년만에 유력 인사들이 불만을 표할 만큼 관료들의 보신주의는 팽배하다. 관료 입장에선 운만 띄우고 대기업이 알아서 해주는 것이 이들에겐 최선이다. 정책 중 상당수가 핵심 산업의 중요성을 재확인 하거나, 대기업의 전략에 후행적으로 편승하는 경향을 띠었다.

      나랏돈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뻔하다. 차세대 반도체 기술개발에 10년간 쓰겠다는 돈이 1조원이다. 정부는 예산 부족으로 기상항공기를 띄우는 데도 애를 먹었다. 삼성전자는 미세먼지연구소를 설립했고, LG그룹은 공기청정기 1만대를 기부했다.

      한 자본시장 관계자는 “웬만한 기업들은 정부 정책에 부응하고 일자리를 만들라고 해봐야 호응하지 않는다”며 “정부로선 정부 눈치를 봐주는 대기업 그룹에 집중하는 것이 효과적이다”라고 말했다.

      대기업들은 정부와 가까워지면 위험하지만, 또 멀어지면 얼어 죽다 보니 정부에 호응하는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다. 대기업 총수들은 지배구조 안정, 형사 소송 진행 등 일신의 과제에 맞닥뜨려 있다. 정부와 사법부는 독립 관계라지만 벌써부터 ‘국가 경제 위기→재벌 총수의 결단→형사적 사면’이라는 흐름을 예상하는 의견이 많다.

      ◇생색은 정부가 냈는데 부담은 기업에

      정부 정책에 화답하는 모습을 보이는 순간 대기업들의 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있어 반도체는 ‘키워야 할 영역’에서 ‘키워야만 하는 영역’이 되었다. 정부는 1조원을 말하는데 두 기업은 250조원을 넣어야 한다. 삼성전자는 대형 M&A를 검토해왔는데 패가 확실히 드러난 만큼 향후 M&A 협상력도 약화할 수밖에 없다. SK하이닉스에 대해선 메모리 반도체 사이클 하강 국면에선 투자보다는 있는 곳간을 잘 지키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는 우려도 나온다.

      한동안 반도체 전문인력 육성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인력 채용도 가벼운 목표가 아니란 지적이다. 반도체 학과 설립에서도 실질적인 정부 지원을 기대하기 어렵다.

      현대차가 광주형 일자리로 얻을 실익도 불분명하다. 법인의 계열 편입을 우려해 광주시(지분율 21%)에 이은 2대주주(19%)에 머물렀지만 경영 전반의 책임은 현대차가 질 수밖에 없다. 국내외 생산공장 간 물량 잠식, 기존 노조 반발 등 신경써야 할 것이 많다. 신용등급 하향 압박 속에 '미래차'에 대한 고민도 놓을 수 없다.

      한 법인 설립 작업 관계자는 “정부의 관심이 높다 보니 현대자동차그룹도 각별히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며 “향후 사업이 잘 되는 것처럼 밀어주자니 명분이 없고 그렇다고 일감을 두고 싸우지 않을 만큼 일이 많을 지도 미지수”라고 말했다.

      대기업 입장에선 정책 목표에 따라 좌지우지 된다는 인상을 주는 것도 부담스럽다. 가뜩이나 해외 자본들이 총수들의 경영권을 견제하기 위해 고리눈을 뜨고 있는 상황이다.

      ◇기업이 정책에 충실해도, 그렇지 않아도 걱정

      대기업이 정부와 보조를 맞춰야겠지만 곳간을 모두 열어젖힐 수도 없는 노릇이다. 맞춰주는 시늉은 하되 얻어 가는 것에 더 집중할 것이란 지적이다.

      주요 대기업들이 펼친 투자 보따리는 일견 묵직해 보이나 이미 전에 내놓은 청사진과 겹치는 것들이 많다. 기업은 하나인데 총수 문제가 있을 때마다, 정부가 압박할 때마다, 유력 인사들이 방문할 때마다 내놓는 숫자가 더 커지기도 한다.

      대기업들이 짧은 기간만 보고 전략을 짜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당연하다. 실질적인 투자 효과가 크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100조원의 돈이 있더라도 토지 매입에 막대한 돈을 쓰고, 또 나머지 돈을 십 수년으로 나누면 경상적인 투자 수준과 다를 바 없을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장기 투자는 규모를 키우는 효과와 더불어 시간을 버는 효과도 있다. 공교롭게도 많은 대기업이 2030을 외치고 있다. 정부의 발표는 말 그대로 ‘홍보’에 그칠 공산이 크다.

      기업들이 정부의 말을 곧이 곧대로 들었다 쳐도 문제란 지적이다.

      이전 정부들이 녹색성장, 창조경제 등 큰 화두를 내걸었다면 이번 정부는 4대니, 8대니 하는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하는 경우도 많다. 반도체, 석유화학, 디스플레이 등 정부가 공을 들이는 산업은 우리 경제의 주력이면서도 변동성이 큰 것들이다.

      다른 자본시장 관계자는 “반도체, 석유화학 등은 모두 사이클을 타는 업종이라 정부가 그 쪽에만 힘을 쏟았다가 하강 국면이 겹치면 한국 경제가 큰 불황의 늪에 빠질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