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픈뱅킹' 연내 도입..."은행이 백오피스로 전락" vs "플랫폼 사업자 우뚝"
입력 2019.07.11 07:00|수정 2019.07.12 10:45
    • "오픈뱅킹 이후의 은행업 전망은, 좀 과격하게 말하자면, 간단합니다. 은행이 고객 계좌 정보나 제공하는 백 오피스(후선지원)가 될 것인지, 금융 플랫폼 사업자가 될 것인지 운명이 갈릴 겁니다." (한 증권사 금융 담당 연구원)

      올 하반기 도입될 '오픈뱅킹' 정책을 앞두고 은행권이 술렁이고 있다. 수십년간 은행이 독점해왔던 자사 고객에 대한 계좌정보와 지급결제기능을 의무적으로 개방해야 하는 까닭이다.

      앞서 이를 도입한 영국 등 선진국에서 오픈뱅킹의 파급력이 아직 생각보다 크지 않았던 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 상대적으로 고소득·저연령의 은행 핵심고객층이 오픈뱅킹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고객관리 정책을 뒤집어야 할만한 파급력이 있다는 사실도 입증되고 있다.

      ◆ '패러다임 시프트' 도화선 될 오픈뱅킹

      지금까지는 A은행의 내 계좌에서 현금을 인출하거나 다른 계좌로 입금하려면 A은행에 방문하거나 A은행의 관련 앱(애플리케이션)을 사용해야 했다. 오픈뱅킹이 도입되면 인터넷 포털이나 B은행앱, 핀테크업체의 관련 앱으로도 A은행의 계좌에 접근해 같은 업무를 처리할 수 있게 된다.

    • 이미 국내에는 비슷한 역할을 하는 '공동 오픈 API'가 2016년부터 도입돼있다. 금융결제원의 금융공동망 일부를 공개해 핀테크 기업 등 제3자(서드파티)들이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다. 토스·카카오페이 등 간편결제 사업자들이 이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

      다만 오픈 API는 수수료가 건당 400~500원 수준으로 매우 비싼데다, 개방 대상이 '소형 핀테크 기업'으로 한정돼 확산하지 못했다.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32개 기업만이 이를 활용하고 있다.

      이번에 정부가 주도하는 오픈뱅킹은 오픈 API를 전면 개편하고 고도화하는 작업이다. 최근 정부가 발표한 추진방안에는 ▲사용 수수료를 건당 40~50원 수준으로 조정하고 ▲인터넷전문은행까지 정보 제공기관에 포함하며 ▲전자금융거래법을 개정해 은행결제망 개방 의무를 법으로 규정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오픈뱅킹의 핵심은 은행이 자사 고객에 가지고 있던 독점적인 권한을 허무는 것이다. 핀테크 기업은 물론, 경쟁 은행까지 내 고객의 계좌에 접근해 송금·인출·간편결제는 물론 금융 데이터 분석·상품 추천 등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한 은행 관계자는 "창구 영업→고객 확보→상품 추천 및 관리라는 은행의 기본 영업의 틀이 무너지게 되는 것"이라며 "앞으론 어떤 상품을 어떤 수익률에, 얼마나 편한 방법으로 고객에게 제공할 수 있느냐가 핵심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 현실에선 아직 '미풍'...'핵심고객 이탈' 대비 차원 접근

      그렇다면 국내보다 2년이나 앞선 2018년 1월 오픈뱅킹을 전격 도입한 영국에선 '금융 혁명'이 일어나고 있을까. 현실은 아직 다소 거리가 있다는 평가다.

      하나금융연구소에 따르면 오픈뱅킹 1주년을 맞아 올해 초 파이낸셜타임즈가 영국 국민 2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오픈뱅킹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다'고 응답한 비율은 25% 수준에 그쳤다. 이 중 오픈뱅킹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전체 응답자의 5%에 그쳤다.

      다만 비슷한 시기 베인앤컴퍼니가 내놓은 보고서에 따르면 영국에서 은행과 거래 중인 고객 4000명중 63%는 더 나은 서비스를 위해 자신의 계좌정보를 경쟁은행이나 핀테크 기업에 제공할 수 있다고 답했다. 특히 55세 미만, 연봉 5만5000파운드(약 8000만원) 이상의 상대적 저연령-고소득층일수록 호의적이었다. 이들은 영국 은행 수익의 45%가량을 차지하는 핵심 고객층이다.

      오픈뱅킹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지만, 더 나은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면 언제든 거래 방식을 바꿀 수 있는 잠재적 수요가 많다는 뜻이다. 이는 결국 은행-은행간, 은행-핀테크간 서비스 경쟁으로 이어질 거란 평가다.

    • 이 과정에서 핀테크 기업과 은행의 합종연횡도 활발히 이뤄질 전망이다.

      은행은 보안성을 중시한 무거운 시스템을 사용한다. 개발 시기·기능별로 수십여 종류의 코어뱅킹 시스템을 보유하고 있어 레거시(legacy;유산) 시스템이라고도 부른다.

      이 때문에 핀테크만큼 기민하게 서비스를 내고 사용자에 맞게 수정하긴 어렵다. 자연스럽게 소매 고객을 접촉하는 하부 시장은 핀테크 기업들이 담당하고, 기업 고객 접촉과 보안·관리 등 상부 시장은 은행이 담당하는 방식으로 역할이 분화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오픈뱅킹이 본격화하기 전 핀테크에 API를 개방하고 협업을 추구한 독일 피도르 은행이 대표적인 협업 롤모델 중 하나로 꼽힌다.

      2009년 설립된 인터넷전문은행인 피도르 은행은 자사 API를 공개하고 크라우드펀딩 그룹인 시드레스, 개인자산관리 회사인 넛메그 등과 협업을 추구했다. 그 결과 창업 5년만에 흑자 전환에 성공했고, 핵심 고객 30만명을 보유하게 됐다. 당시 피도르 은행의 총 직원 수는 40여명으로 직원 1명당 고객 7500명을 관리하는 수준이었다.

      ◆ 은행 생존 전략 연계...핀테크 M&A 활성화 가능성

      은행의 생존 전략도 새 패러다임에 맞춰 세울 수밖에 없을거란 평가다. 핵심 자원을 외부에 공개하며 독점적 지위가 약화하고 경쟁 강도는 거세질 수밖에 없다.

      반면, 대면창구의 필요성이 줄어 고정비가 떨어지고, 핀테크와의 협업을 통해 연구개발(R&D)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기회도 주어질 전망이다. 올해 1분기 기준 국내 은행의 총 판관비는 5조7000억원으로 총이익의 절반에 가까웠다. 수익 대비 IT비용도 9% 안팎으로 타 업권 대비 3배 이상 높다.

      이런 효과를 누리려면 결국 은행이 플랫폼 사업자가 되어 핀테크의 서비스를 두루 제공하는 플랫폼 사업자가 되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분석이다. 얼마나 경쟁력있는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플랫폼이 될지가 생존과 직결될 거라는 말이다.

      삼정KPMG 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오픈뱅킹 시대 은행의 핵심 추진 수단은 누구에게, 얼마나 API를 개방할지로 귀결된다. 주요 잔액조회 등 API가 이미 개방된 상황에서 개방의 종류와 범위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특정 사업 파트너에게만 API를 개방할지, 불특정 다수에게 개방할지가 모두 개별 금융그룹 및 은행의 전략적 선택이 될 수 있다.

      자칫 잘못하면 상품개발 등 핵심역량의 외부 의존도가 심해져 은행이 단순한 데이터 전달자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이런 맥락에서 은행을 중심으로 한 핀테크 인수합병(M&A) 시장이 활성화될지 여부에 관심이 모이고 있다. 정부는 오픈뱅킹 도입과 더불어 금융회사의 핀테크 기업 지분 보유 15% 규제도 폐지했다. 앞으로 금융그룹이 핀테크 기업을 직접 자회사 혹은 손자회사로 100% 보유할 수 있게 된다.

      이전까지는 해당 규제 때문에 핀테크 기업을 금융그룹이 인수하는 게 쉽지 않았다. KB증권에 따르면 2016년 이후 3년간 글로벌 금융시장에서는 4000여건의 핀테크 관련 M&A가 있었지만, 국내에서는 9건에 불과했다.

      금융권 관계자는 "지금까지는 핀테크 기업이 정부기관의 인허가, 금융기관과의 MOU, 지급결제망을 이용하기 위한 비용 조달 등 많은 것들을 스스로 감내해야 했다"며 "이제는 핀테크기업이 매력적인 비즈니스 모델만 확보한다면 금융기관이 핀테크기업에 출자해 필요한 인프라와 자본을 공급해줄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