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발질한 연기금? 지수 못 지키고 외국인 '현금인출기' 됐나
입력 2019.08.08 07:00|수정 2019.08.09 11:25
    대내외 불확실성 여전한데...'매수 타이밍 이르다'
    7일 오전 주식 팔다 外人 순매도 늘자 순매수 전환
    "향후 매도세 더 거세질수도"...코스닥은 소외
    '그래도 덕분에 1900 버틴 것' 옹호 목소리도 존재
    • 국민연금 등 연기금이 8월 이후 급락장에서 대규모 순매수에 나선 것을 두고 금융시장의 반응이 엇갈리고 있다. 급락장에서 외국인 투자자들의 매물을 받아내는 거의 유일한 매수 주체로서 '현금인출기' 역할을 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크다.

      물론 연기금이 그나마 지수를 받쳐줬기에 종가 기준 코스피 1900선이 밀리는 최악의 상황은 피했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다만 대내외 불확실성이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이른 시점의 대량 매수는 결국 국내 증시에 독이 될 수 있다는 의견이 좀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

      국민연금 등 연기금은 이달 들어 6일까지 4거래일간 코스피 시장에서 1조4623억원을 순매수했다. 5일 기록한 5207억원의 순매수는 8년만에 최대치였다. 연기금의 순매수량은 이 기간 전체 국내 기관 순매수 2조2154억원의 3분의 2에 달한다.

      이 기간 코스피지수는 107.5포인트, 5.3% 급락했다. 개인투자자 보유 지분의 반대 매매도 영향을 미쳤지만, 무엇보다 핵심적인 원인은 외국인의 매도세였다. 7월 코스피에서 2조원 넘게 순매수를 기록했던 외국인들은 4거래일간 1조3000억원의 매물을 쏟아냈다.

      문제는 이번 폭락장에서 연기금의 '역할'이 무엇이었느냐다. 증권가 일각에서는 연기금이 외국인들이 떠넘긴 매물을 받아주며 더 빠르게, 더 높은 가격에 국내 증시에서 이탈할 수 있는 계기를 주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 대표적인 종목이 삼성전자다. 외국인들은 이달 들어 삼성전자 주식 6000억여원어치를 내다 팔았다. 이를 받아준 주체는 연기금이었다. 연기금은 이 기간 4000억여원어치의 삼성전자 주식을 사들였다.

      코스피 지수가 5.3% 떨어지는 동안 삼성전자 주가는 4%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시가총액 1위 삼성전자가 지수를 아웃퍼폼(outperform;상대적 상승)한 것이다.

      한 자산운용사 운용역은 "결국 국민연금을 비롯한 연기금들이 외국인들의 이탈을 도와준 셈"이라며 "수익률을 생각하면 주가가 충분히 빠진 후 반등할 때 매수에 나섰어야 할텐데, 떨어지는 칼날을 직접 손으로 받았다"고 지적했다.

      연기금들은 사실상 거의 인덱스(Index)에 맞춰 시가총액 순서대로 주식을 사들였다. 우선주 제외 시가총액 상위 5개사인 삼성전자·SK하이닉스·현대자동차·네이버·현대모비스 순매수 총액이 6000억여원으로 전체 순매수의 거의 절반에 달했다. 외국인들의 매도세도 이들 시총 상위 종목에 집중됐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자신들이 주식을 투매해도 한국 연기금이 다 받아줄 거라는 잘못된 시그널을 보낸 셈"이라며 "해외 헤지펀드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나리오로써, 앞으로 외국인 매도세가 더 거세질 수 있다"고 말했다.

      너무 빨리 나선 게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국민연금을 비롯해 연기금의 '총알'은 무한하지 않다. 급락장에 이미 상당 부분 현금을 소모해 추가 매수에 대한 여력은 그만큼 적아졌을 거라는 평가다.

      최소한의 대응만 하다가 반등 신호가 왔을때 저가 매수했다면 지수 낙폭이 컸을지라도 회복이 빠르고, 수익률도 높일 수 있었을 거라는 분석도 나온다.

      주식시장에서는 국민연금의 국내 주식 추가 매수 여력을 적게는 2조원에서 많게는 5조원 수준으로 보고 있다. 국민연금은 2020년말까지 국내 주식 비중을 17.8%로, 2024년까지 15% 수준으로 줄일 계획이다. 사학연금·공무원연금 등 다른 연기금들도 대부분 국내주식 비중 축소가 당면과제다.

      한 연기금 주식운용 담당자는 "국민연금이 최근 워낙 열심히 주식을 샀기 때문에 우리도 일부 따라서 매수한 부분이 있다"며 "솔직히 추가 매수 여력은 자산 포트폴리오상 그다지 크지 않다"고 말했다.

      연기금은 7일에도 '지수 지킴이' 역할을 자청했다. 장 초반 코스피 시장에서만 한때 최대 470억원을 순매도하던 연기금은 이날 오후들어 외국인 순매도 폭이 커지자 주식을 다시 사들이기 시작해 오후 2시34분 순매수로 전환했다. 이후 200억원 가까이 순매수에 나서며 외국인들의 매물을 받아냈다.

      연기금이 코스닥 시장을 철저히 외면한 데 대해서도 여러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8월 들어 6일까지 연기금의 코스닥 순매수는 120억여원에 그쳤다. 코스피 순매수량의 10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 기간 코스닥지수는 코스피의 2배가 넘는 12.5%의 하락률을 보였다. 이를 두고 증시 관계자들은 '현 정부의 코스닥 활성화 정책이 구호에 그쳤음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연기금을 옹호하는 목소리도 없지 않다. 그나마 연기금이 버텨줬기에 종가 기준 코스피는 1900, 코스닥은 550선을 지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코스피지수가 3% 가까이 급락한 지난해 10월23일엔 외국인이 5624억원을 순매도하는 가운데 연기금도 618억원을 순매도하며 시장 패닉에 일조했다. 이 때와 비교하면 지금 연기금의 순매수는 수급이 무너진 가운데 가뭄의 단비 역할을 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증권사 관계자는 "어차피 연기금은 급락장에 주식을 사도 욕을 먹고 사지 않아도 욕을 먹는 존재"라며 "이번 폭락장에서 좀 더 스마트하게 시장을 보조해줬으면 훨씬 좋았겠지만, 시장 안정을 위해 순매수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행위 자체를 삐뚤게 볼 필요는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