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만에 25일 연속 순매수한 연기금, 왜?...시장왜곡 우려도
입력 2019.10.07 08:03|수정 2019.10.08 09:30
    횡보장에서 '묻지마 매수'...투자업계 '이해 안 가'
    대통령 펀드 가입 후 22거래일간 3조원 넘게 순매수
    조정 없는 연기금 위주 수급에 변동성만 커진다 지적도
    • 국민연금을 비롯한 연기금이 코스피 시장을 왜곡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지수 방어 위주의 '묻지마 매수 전략'으로 지수와 개별종목간의 괴리를 심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오랜 기간 운용업계에 발을 담갔던 전문가들은 연기금의 집중 매수를 매우 의아해하고 있다. 폭락장도 아닌, 횡보장에서 이렇게 무리해서까지 외국인들의 매물을 받아낼 이유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연기금은 9월 한 달 동안 코스피시장에서만 2조5500억여원을 순매수했다. 놀라운 점은 9월 한달동안 19거래일 가운데 하루를 빼고 모두 순매수를 했다는 점이다. 8월부터 따지면 8월21일부터 25거래일 연속 순매수를 기록했다. 이는 2001년 7월 이후 20여년만에 첫 기록에 해당된다.

      연초 이후 연기금 순매수 규모는 8조2000억원을 넘어가고 있다. 이미 2015년 연간 순매수(8조4500억여원)에 육박한다. 연기금은 8~9월 두 달간 2016년 연간 순매수(3조8900억여원)에 가까운 매수세를 보이고 있다.

      이러다보니 투자업계에서는 매일 장중 12시와 2시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연기금이 이 시간대 집중적으로 매수에 나서는 패턴을 보이는 까닭이다. 지난 1일에도 장 초반 순매도에 나서던 연기금은 오후 들어 순매수로 전환했고 장 막판에는 900억원까지 순매수를 늘렸다. 이에 힘입어 오전 중 약세였던 코스피지수는 상승 마감했다.

      문제는 연기금이 시장을 주도하던 지난 한두달 동안 코스피에서는 상승하는 종목보다 하락하는 종목이 많은 장세가 펼쳐졌다는 것이다. 요컨데 연기금의 자금이 섹터별로 고루 분산된 것이 아니라, 시가총액 상위권 일부 종목에만 쏠렸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9월 한 달 동안 연기금이 가장 많이 사들인 종목은 삼성전자였다. 6300억여원을 순매수했다. 전체 순매수의 25%에 달한다. 현재 코스피지수에서 삼성전자가 차지하는 비중(21%)보다도 높다. 현대자동차에 1630억여원, SK하이닉스엔 1440억여원, 현대모비스 610억여원, 네이버에 500억여원이 쏠렸다.

      9월 코스피지수는 1960선에서 2100선 근처까지 올라섰다. 이 기간 순매수에 나선 주체는 사실상 연기금이 유일하다. 외국인은 8~9월 두 달간 3조1600억여원의 코스피 주식을 내다팔았다.

      그 누구도 9월 중 코스피지수가 13거래일 연속 상승하며 강세를 보일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올해 3분기 코스피 상장사 3분기 순이익 컨센서스는 34조8000억여원으로 지난해 3분기 대비 33% 줄어든 수준이다. 특히 반도체 부문의 부진이 장기화하는 추세다. 메모리 반도체 스팟 거래 가격은 올해 3분기 전년대비 18% 하락했고 4분기에도 두 자릿 수 하락이 예상되고 있다. 반도체 턴어라운드(업황회복)은 일러야 내년 2분기라는 전망에 힘이 실린다.

      매크로(거시경제) 상태가 좋은 것도 아니다. 9월 소비자물가는 사상 첫 마이너스를 기록하며 디플레이션(경기침체) 우려가 더욱 커진 상황이다. 9월 중 '스몰 딜'(제한적 타결)이 예상됐던 미국과 중국의 무역회담은 오리무중인 상태이고,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탄핵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미국과 북한의 실무회담도 탄력을 받기 어려운 상태다.

      조정을 기다리던 금융권 투자주체들은 연기금의 독주로 지수는 오르고 중형주·소형주는 주가가 미끄러지는 상황이 이어지자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지난해 폭락장엔 외국인 주도의 매도세를 방조했던 연기금이, 단기 조정을 기다리던 횡보장에서 갑자기 강력한 매수 주체로 나선 까닭이다.

      한 자산운용사 운용역은 "국민연금을 주축으로 한 연기금의 순매수 일변도의 움직임을 이해하기 어렵다"며 "지난달 27일 연기금이 갑자기 순매도로 돌변한 것은 애매한 증시 상황에 '사상 최초 코스피 14거래일 연속 상승'이라는 타이틀은 어울리지 않아 13거래일에서 멈춘 것이 아니겠냐는 소문이 돌고 있다"고 말했다.

      이러다보니 문재인 대통령의 펀드 가입 이후 연기금이 총대를 매고 '수익률 방어'에 나선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올 정도다. 우연히도 대통령이 NH아문디자산운용의 필승코리아 펀드펀드에 가입한 지난달 26일 이후 연기금은 코스피시장에서 22일 연속, 3조원을 순매수했다. 필승코리아펀드는 삼성전자 19.5%를 비롯해 LG화학 5.1%, SK하이닉스 5%, 현대자동차 4% 등 코스피 시가총액 상위 종목들을 주로 담고 있다.

      다른 운용사  관계자는 "증권가에는 VIP(대통령)의 펀드에 흠집을 낼 순 없으니 국민연금이 나서 수익률을 지켜주는 거라는 소문까지 파다하다"며 "연기금의 이 정도 연속 순매수가 워낙 드문일이다보니 이런 해석까지 나오는 셈인데 정작 운용역들은 시장을 교란하는 수준이라며 분통을 터트리고 있다"라고 말했다.

      더 큰 문제는 이 같은 움직임의 실효성이다. 즉 시장에 위기설에 감돌 때 시가총액 상위 종목에 집중해 가격을 끌어올려 매수하는 연기금의 매매 전략에 대한 의구심도 나온다.

      지난 2008년 10월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 연기금은 9월 한 달 동안 3조원이 넘게 코스피시장에서 주식을 순매수했다. 대부분 외국인들이 팔아치우던 삼성전자에 매수가 집중됐다. 당시 삼성전자 주식은 연기금의 매수세에 힘입어 한달 새 주가가 10% 올랐다. 47%에 달하던 삼성전자 외국인 보유율이 42%대로 떨어지던 시기였다. 이후 금융위기가 불거지며 삼성전자 주가는 보름새 30% 가까이 급락했다.

      결국 연기금 중심의 시장 수급은 증시 변동성만 키운다는 지적이 나온다. 2일 연기금이 1500억원의 순매도를 쏟아내자 코스피지수는 이렇다 할 큰 악재가 없었는데도 전일 대비 2%가까이 하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