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시장엔 대안 없어요'...부동산에 돈 몰리게 한 건 정부
입력 2020.02.20 07:00|수정 2020.02.21 15:33
    중ㆍ저위험 상품 수요는 커지는데
    대주주 기준과 양도소득세 '강화'
    시중 자금 부동산으로 몰릴 수밖에
    선진국 증시 투자 혜택 "이유 있다"
    • #1. 지난해 12월, 권오현 회장을 비롯해 삼성전자 임원들이 앞다퉈 증시에 삼성전자 보통주를 매각했다. 이들은 대부분 약속이나 한듯이 보유 주식 수를 1만5000~1만6000주로 줄였다. 삼성전자 주가가 5만5000원을 넘어서며, 대부분 대주주 기준(1% 또는 시가총액 10억원)에 걸렸기 때문이다. 대주주 기준에 해당되면 향후 매각차익의 27.5%(지방소득세 포함)을 세금으로 내야 한다.

      #2. 2018년 정부가 코스닥시장을 살리겠다며 선보인 코스닥벤처펀드들이 대부분 손실 구간에 접어들었다. 출시 2주만에 3500억원이 넘게 팔렸던 KTB자산운용의 공모 코스닥벤처펀드 1호 설정액은 현재 2000억원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 펀드의 설정 후 수익률은 마이너스(-) 14%다. 이 펀드에 최대한도인 3000만원을 투자했다면 소득공제를 통해 연말정산에서 45만원(근로소득세율 15% 기준)을 돌려받을 수 있었겠지만, 투자 손실액은 그 10배인 420만원이다.

      '국내 금융시장에는 부동산투자만한 대안이 없다'는 푸념의 목소리가 점차 커지고 있다. 금융시장을 세수(稅收)로만 보는 정부의 어설픈 정책과 일부 금융기관의 탐욕이 만나 움직일 수 있는 보폭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역사적인 저금리 시대에 '시장금리 플러스 알파'에 대한 수요는 점점 늘고 있다. 상품 공급은 뒤틀리거나 축소되고 있으니 자금이 갈 곳이 없다는 평가다. 현 시점에서 이런 대규모 유동자금들은 저수익 단기상품으로 잠시 피신해 상황을 살피거나, 혹은 부동산 시장으로 몰려가고 있다.

      중장기적인 증시 부양 정책을 통해 중수익 중~저위험 금융상품 공급을 늘리는 방법이 국가적인 자산배분(asset-allocation)을 위한 가장 합리적인 방안이라는 게 금융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지난해 12월 한창 반도체 업황 회복이 무르익고 있던 와중에 쏟아져나온 삼성전자 주요 임원들의 보유 지분 매각 소식은 '한 편의 코미디'같았다는 게 증권가의 목소리다. 주가 상승기에 매물이 소화됐기에 망정이지, 하락기에 비슷한 이슈가 제기됐다면 주주들의 공분을 살 수도 있었다.

    • 문제는 올해 말에도 같은 장면이 반복될 것이 확실하다는 점이다. 소득세법상 대주주 기준은 내년 4월부터 '지분율 1% 이상 혹은 시가총액 3억원 이상'으로 더 낮아진다. 적용은 4월부터지만 대주주 분류 기점은 올해 연말이다. 삼성전자 주요 임원들이 27.5%의 양도소득세 폭탄을 피하려면 연말까지 현 주가 기준, 1만주 이상을 더 팔아야 한다는 말이다.

      정부는 2017년까지 코스피 기준 25억원이었던 대주주 기준을 내년 3억원으로 대폭 강화하고, 대주주에게 적용되는 양도소득세율도 대기업 주식 기준 20%에서 25%(지방소득세 2.5% 별도)로 높였다.

      이는 대표적인 '증시 적대적 정책'으로 꼽힌다. 일반 주주는 물론, 임원마저 자사의 주식을 장기 보유하기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다. 주가 상승으로 생기는 차익에 27.5%의 고세율을 적용하는 점도 미국ㆍ유럽 등 선진 증시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징벌적 과세라는 평가가 많다.

      한 증권사 고위 임원은 "해당 규제 강화는 증시에 지나치게 안좋은 영향을 주기 때문에 재검토해달라는 건의를 수 차례 했지만 정부는 그다지 신경쓰는 눈치가 아니었다"며 "세수 결손 우려로 인해 추가 증세가 언급되는만큼 지금 와서 완화시키기도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내놨던 거의 유일한 금융시장 부양 정책인 코스닥 활성화 정책의 결과는 참담하다. 이 정책의 총아로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코스닥 벤처펀드는 속속 손실 구간에 진입하고 있다.

    • 증권가에서는 불 보듯 뻔했던 결론이라는 평가다. 코스닥벤처펀드의 핵심경쟁력은 코스닥 기업공개(IPO) 공모주 30% 우선 배정이었다. 코스닥벤처펀드 정책 설계 당시엔 전후 1년간 상장한 신규 공모주의 공모가 대비 평균 수익률이 51%에 달했다.

      지난해 상장한 코스닥 신규 공모주의 연간 평균 수익률은 고작 4%였다. 공모주 수익률은 편차가 심해 예측이 어렵다.

      게다가 올해부터는 코스닥벤처펀드들이 편입했던 코스닥 메자닌의 조기상환 기간이 속속 도래한다. 당시 발행된 메자닌들은 펀드간 과당경쟁으로 인해 표면이자율은 물론, 만기이자율까지 0%인 경우가 적지 않다.

      주가가 상승해야 차익을 낼 수 있는 일방통행 구조인데다, 대규모 상환 부담이 한꺼번에 겹치다보니 올해부터 자산 부실이 본격화할 것이란 비관이 많다. 실제로 공모 코스닥벤처펀드 중 가장 규모가 큰 KTB코스닥벤처 1호가 자산 부실화로 인해 최근 100억원을 상각하기도 했다.

      한 자산운용사 주식운용본부장은 "올해 총선에서 여당은 또 '코스닥ㆍ코넥스 전용 소득공제 장기투자펀드 신설'을 공약으로 들고 나왔다"며 "코스닥벤처펀드와 어떻게 다르게 운용할 것인지 명확치도 않을 뿐더러, 왜 실패했는지 아무 고민이 없어보인다"고 꼬집었다.

      그나마 자산운용 시장의 숨통을 틔워주던 파생결합증권(DLS)이나 사모헤지펀드는 지난해 터진 파생결합펀드(DLF) 불완전판매 사태와 라임자산운용 환매연기 사태로 시장의 신뢰를 잃었다.

      지난해 6월 3조1000억원까지 불어났던 월간 DLS 발행규모는 9월 1조3000억원으로 크게 줄었다. 지난해 8월 35조원까지 커졌던 한국형 사모헤지펀드 시장은 지난해 연말 기준 34조2000억원으로 뒷걸음질쳤다. 금융당국이 라임사태 방지를 위한 사모헤지펀드 규제책을 발표하며 시장은 더 쪼그라들 것이란 예상이 나온다.

      이렇다 보니 시중자금들은 상황을 관망하거나 익숙한 상품으로 돌아가고 있다. 지난해 말 기준 은행의 요구불 및 수시입출금식 예금 잔액은 683조원으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은행 총수신 중 비중도 39.1%로 역대 최대치다.

      월간 발행액이 5조원대로 축소됐던 주가연계증권(ELS) 발행 규모는 급속하게 늘어나고 있다. 지난 1월 ELS 월간 발행규모는 8조2000억여원으로 지난해 1월 대비 49% 늘어났다.

    • 투자처를 찾는 자금은 여전히 부동산 시장으로 달려가고 있다. 한국감정원에 따르면 2월 첫째주 서울 아파트 매매가격지수는 0.01% 상승하는데 그쳤지만, 경기도는 0.39% 상승했다. 수원시 권선구와 영통구는 한 주 사이에 2% 넘게 가격이 올랐다. 용인 수지구, 성남시 수정구 아파트 매매가격도 급등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부동산 대책으로 서울 투자가 어렵게 된 자금이 강남 접근성이 좋은 경기도 지역으로 몰리고 있는 형국이라는 설명이다. 실제로 경기도 아파트 매매가격은 12월 부동산대책 이후 5주 연속 상승세다.

      금융권에서 '부동산 가격을 잡고 싶으면 증시를 부양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저금리와 미국ㆍ유럽의 양적완화로 늘어난 유동성이 결국 투자처를 향해 가야 하는데, 증시 홀대와 대형 금융상품 사고 등으로 인해 결국 부동산으로 흘러들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선진국이 세금 우대 등으로 증시 투자에 혜택을 주는 건 이런 까닭에서다. 미국은 증시 장기자본이득에 대해 분리과세하며 우대세율을 적용한다. 자본손실을 공제하고 순자본이득에만 세금을 매긴다. 일본은 1989년부터 증권거래세를 낮추기 시작해 1999년 완전 폐지했다. 반면교사로 대만의 경우 1989년 자본이득세를 전면적으로 도입했다가 증시 폭락으로 1년만에 이를 철회하기도 했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지난해 MSCI(모건스탠리인터내셔널지수) 신흥국 지수 조정으로 폭락장을 겪었던만큼, MSCI 선진국 지수 진입 필요성이 커진 상황"이라며 "MSCI측에서 지속적으로 '환전 제약'을 편입불가 요소로 지적하고 있는만큼, '역외 원화시장' 설치를 검토하는 것도 증시 활성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