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회 구성 바꿔라" 실리콘밸리 움직임…국내 대기업은 무방비 상태
하지은 기자 | hazzys@chosun.com | 2020.02.21 07:00
Edited by 이도현 차장 | dohyun.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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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골드만삭스 "이사회에 여성 필수로 둬라"
아시아는 미포함됐지만 변화는 강제적인 수순
여성임원 비중은 미국 24.3%, 한국1.3%...추후 혼란 예상

글로벌 투자자들이 각 기업들에 이사회 구성의 다양성을 적극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우선은 미국과 유럽 지역에서부터 변화가 시작됐지만 이 요구는 아시아에도 곧 강제적으로 불어 닥칠 가능성이 높다. 특히 국내 대기업 대부분은 글로벌스탠더드 수준에도 못미쳐 향후 이사회 문제가 투자자로부터 발목을 잡힐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최근 미국계 행동주의펀드인 엘리엇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25억달러(약 3조원)를 투자해 소프트뱅크 시가총액 3%에 해당하는 지분을 확보했다. 엘리엇이 단일 기업에 투자한 규모로는 사상 최대다.

엘리엇은 소프트뱅크에 의사결정 등 지배구조 투명성 강화를 중점적으로 요구했다. 구체적으로는 이사회 멤버 전원이 남성인 점과 사외이사가 2명뿐인 점을 지적하며 불만을 표출했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손정의 회장 역시 이 제안에 동의해 지난해 말부터 새로운 이사진을 물색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소프트뱅크가 운용하는 1000억달러 규모의 비전펀드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정보기술(IT) 전문 펀드로, 투자업계도 비전펀드가 촉발할 실리콘밸리의 변화 조짐에 주목하고 있다.

지난달엔 글로벌 투자은행(IB)인 골드만삭스가 비슷한 논리로 투자 방식을 바꿀 것임을 예고하기도 했다. 골드만삭스의 데이비드 솔로몬 최고경영자(CEO)는 1월말 CNBC와의 인터뷰에서 “올해 7월부터 미국과 유럽에서 여성이나 비(非)백인 이사회 멤버가 없는, 다양성이 결여된 기업들의 기업공개(IPO)를 돕지 않을 것”이라며 “특히 초점은 여성 멤버의 유무로, 내년엔 요구 인원을 두 명으로 늘릴 것”이라고 말했다. 골드만삭스는 최근 미국과 유럽에서 상장한 60개 기업들이 모두 백인 남성으로만 이사회를 채웠다고 지적했다.

지난 4년간 IPO를 한 기업 중 여성 이사가 포함된 기업이 수익을 더 잘 냈다는 게 골드만삭스의 논리다. 솔로몬 CEO는 “사업 기회를 조금 놓칠 순 있겠지만 장기적으론 해당 기업 주주들에게 프리미엄의 수익률을 제공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엘리엇과 골드만삭스가 글로벌 기업들에 잇따라 이사회 구성 변화에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는 점은 자본시장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기업 입장에서 대규모 투자자금을 운용하는 ‘큰손’들의 요구 사항을 간과하기 어렵고, 결국 국제적 기준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간 세계 시장에서 몸집을 키우며 존재감을 과시해왔던 기업들이 수익성을 입증하지 못하면서 주주를 포함한 투자자들이 이들의 경영방식과 지배구조에 의문을 제기해왔다. 투자자로부터 외면 받을 수 있는 기업들은 경영권과 감독권이 도전을 받는 리스크를 감수하고서라도 이들 요구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됐다.

비록 이번 결정엔 미국과 유럽 지역만 해당되지만 아시아도 곧 수순을 밟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엘리엇과 골드만삭스를 시작으로 다른 기관 투자자들도 이 추세에 편승할 수 있다. 그간 수익성을 증명하지 못했던 데다 각종 시장 악재와도 맞물려 수세에 몰려왔던 국내 주요 대기업과 유니콘 기업들도 안심할 수 없다. 엘리엇이 이번엔 소프트뱅크를 직접 정조준했지만 삼성물산, 현대자동차에 이어 다른 한국 기업으로 영향력을 늘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알토스벤처스의 한 킴(한국명 김한준) 대표도 SNS를 통해 “아시아는 이번 결정에 제외됐지만 언젠가는 포함될 것”이라며 “한국 기업들도 이사회에 여성과 외국인 멤버를 포함시키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 경영진도 적격자를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한 바 있다.

등기임원

이사회 다양성이 국내에서도 정량평가 기준으로 자리잡을 경우 국내 대기업 중에선 이를 충족할 수 있는 기업은 사실상 거의 없다. 다양성을 가진 이사 비율이 24% 수준이라는 미국도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며 조급함을 드러내고 있는데 한국은 1% 수준에 그친다.

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MIT) 슬론 경영대학원에 따르면 S&P 500개 기업의 이사회 구성원 가운데 여성 비중은 10명 중 2명 수준이다. 미국 포춘 100대 기업 기준으로도 여성 등기임원 비중은 24.3%였으며, 각 그룹별로 최소 4명에서 최대 6명의 여성 이사가 있었다.

기업 경영성과 평가사이트 CEO스코어가 국내 30대 그룹 256개 계열사의 2018년 등기임원 1654명을 전수조사했더니 여성 등기임원(21명)은 1.3%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30대 그룹 중 11곳만이 여성 임원을 두고 있었고, 이마저도 삼성(5명)·SK(4명)·롯데(3명)·현대자동차(2명)를 제외하면 7곳 전부 1명에 그친다. 자산총액 2조원 이상의 상장기업 이사회에 한 명 이상의 여성 임원을 두도록 권고하는 자본시장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할 경우 대기업들은 2년 안에 여성 등기임원을 선임해야 하지만 준비된 국내 기업이 많지 않다.

특히 여성이 주 소비층인 화장품 업종 기업은 여성 임원 비중에 있어서 투자자들에게 보다 엄격한 기준을 적용 받을 거란 전망도 나온다.

에스티로더

실제로 국내 화장품 기업들의 여성 임원 비율은 해외기업 대비 현저히 낮다. 글로벌 화장품 브랜드 에스티로더컴퍼니즈 자료에 따르면 전체 이사회 구성원 16명 중 여성 임원은 7명으로 전체의 44% 수준이었다. 국내에서 가장 대표적인 화장품 기업인 LG생활건강과 아모레퍼시픽은 각각 7명 중 0명, 8명 중 1명만이 여성이었다.

투자은행(IB)업계 한 관계자는 “한국은 그간 사내이사와 사외이사 풀(pool)이 너무 작다는 평가를 받아왔지만 그 중에서도 여성과 외국인 이사 풀은 사실상 거의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라며 “특히 여성 고객이 주 소비층인 업종의 기업 이사회에서 여성 이사가 사실상 부재한 점은 투자자들이 충분히 지적 가능한 사안”이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여성이나 외국인의 권리 신장 관점에서 접근할 게 아니다”라며 “글로벌 투자자들이 포트폴리오 기업들에 수익성 강화 측면에서 지배구조에 주안점을 두기 시작했고, 결국 공통된 기조가 형성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하고 또 대비해야 한다”고 전했다.

[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2020년 02월 17일 07:00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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