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산 없는 싸움은 해보지도 않겠다는 국민연금
입력 2020.02.21 07:00|수정 2020.02.24 10:34
    대주주 54% 효성은 '빼고' 23% 대림산업 '넣고'
    주주가치 훼손 이력 명백해도 '승산 따라' 주주활동
    정책·법률 근거 마련돼도 책임투자 '공염불'
    • 국민연금이 주주권을 강화하며 책임투자 활성화를 위해 칼을 빼들었다지만, 실상을 들여다 보면 승산 없는 싸움은 피하겠다는 의중이 드러난다.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이후 국민 노후자금의 수탁자로서 원칙에 따라 주주활동을 하겠다고 밝힌 것과는 정반대 행보다.

      국민연금은 주총 전 대림산업을 포함한 56개 기업에 대한 주식 보유 목적을 '일반투자'로 변경하면서 효성은 제외했다. 국민연금의 효성 주식보유 목적은 여전히 '단순투자'인 채다. 효성에 대해서는 의결권 행사 외 위법행위 임원의 해임을 청구하거나 정관을 변경하는 등의 요구를 할 수 없다.

      효성과 대림산업은 다가올 정기 주주총회에서 국민연금의 최대 승부처로 손꼽혀 왔다. 두 기업 모두 최대주주가 횡령·배임·사익편취 등 범죄 혐의로 재판이 진행 중이고 오는 3월 임기 만료를 앞두고 있다. 주주 가치 훼손을 이유로 시민단체를 비롯해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 내부에서도 국민연금의 주주제안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컸다. 국민연금도 이들 기업을 책임투자 대상으로 선정했다고 공시한 바 있다.

      국민연금 입장에서 두 기업 사이 차이점이 있다면 대주주의 지분율이 '과반을 넘기느냐' 정도다. 지난해 9월 기준 효성의 특수관계자 보유지분 합계는 54.72%고 대림산업은 23.12%다. 국민연금은 효성 지분 10%, 대림산업 지분 12.82%를 보유하고 있다. 대림산업은 해볼 만한 싸움인 반면 효성은 패배가 확실시 되는 싸움인 셈이다.

      효성이 지난해 영업익 1조원 클럽에 복귀하며 조현준 회장의 경영성과가 증명된 만큼 오너경영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 기업가치 개선에 도움이 되는 편이라 판단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대림산업 역시 지난해 영업익 1조원을 돌파해 어닝서프라이즈라는 평가를 받았다. 대림산업을 겨냥하면서 효성에 대해선 소극적으로 나서는 이유로 승산을 미리 재보고 알아서 발을 뺀 것 아니냐는 비판이 가장 먼저 나오는 이유다.

      국민연금이 과반 지분을 보유한 대주주를 상대하기 부담스러워 한다는 사례는 남양유업 경우에도 드러난다.

      국민연금은 지난 1월 남양유업을 공개중점관리기업에서 해제했다. 국민연금은 2015년 이후 과소배당을 이유로 남양유업에 대해 5년간 주주활동을 해왔다. 그러나 남양유업의 배당정책은 크게 개선된 것이 없는 상태다.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수탁위 내부에서 반발도 심했고 추후 모니터링을 지속하겠다고 밝힌 것도 이를 의식한 것"이라고 한다. 남양유업의 대주주 일가 지분율은 53.85%다.

      일각에선 대주주 지분율이 50%만 넘으면 국민연금이라도 어쩌지 못한다는 시그널로 비쳐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정책적 지원과 법률적 근거가 마련됐지만 조직 차원의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자본시장 한 관계자는 "30년 넘게 근무할 국민연금 직원이 5년 임기 정권의 의지대로 일을 복잡하게 만들어야 할 필요가 없다"며 "오너일가가 50% 이상 지분을 보유한 효성을 두고 계란으로 바위를 친들 국민연금 직원들에게 돌아갈 보상체계도 없다"고 전했다.

      국민연금이 책임투자 대상으로 삼은 모든 기업에 일반투자로 보유목적을 변경하고 주주권을 행사해야 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구체적이고 명확한 주주가치 훼손 사례에서 승패 부담에 따라 주주활동 여부를 결정한다면 '수탁자로서 주주활동을 통해 기업가치를 제고하겠다'는 비전은 무색해질 수 있다.

      기업 지배구조 한 전문가는 "민간 자산운용사도 주주권 행사를 위해선 원칙에 입각해 주주활동을 벌인다"며 "지금 상황은 국민연금이 오히려 시장에 잘못된 시그널을 주고 혼선을 부추기는 아마추어적인 행태"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