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조 안정화 대책, 핵심은 '한국은행발 담보 대출'
입력 2020.03.25 07:00|수정 2020.03.26 09:45
    100조원 정부 대책에 한은 직접지원은 2.5조 RP 매입 뿐
    지원 핵심 산은ㆍ기은, 산금채ㆍ중금채로 담보 조달할 듯
    금통위, 지난 12일 산금채까지 적격담보채권으로 지정
    CPㆍ회사채ㆍETF 매입 시작한 美日보다는 보수적
    • 코로나 펜데믹(전세계적 유행병)으로 한국은행의 역할론이 다시 부각했다. 24일 발표된 100조원 규모의 정부 긴급대책에서도 결국 한국은행이 뒷배를 봐야 하는 상황이다. 자금 조달의 핵심이 '한국은행발(發) 담보대출'로 분석되는 까닭이다.

      100조원 규모 패키지 대책의 핵심은 한국산업은행(산은)과 중소기업은행(기은), 그리고 수출입은행 등 국책은행이다. 이들이 서로 분담해 기업의 신용경색을 막고, 현금 라인을 깔아주는 역할을 도맡는다. 이들의 자금 출처가 바로 한국은행이 되는 것이다.

      미국과 일본은 이런 우회 지원을 넘어 기업어음(CP)과 회사채를 직접 매입해 중앙은행이 최종적인 신용 부담자가 되는 '질적완화'에 나선 상황이다. 한은은 제도적 한계로 인해 일단 우회적 지원과 유동성 위기 확산 방지에 주력하는 모양새인데, 미증유의 위기 앞에서 한국은행의 역할론은 계속 부각할 전망이다.

      이번에 발표된 정부 종합 대책에서 한국은행은 단 한 차례, 2조5000억원 규모 환매조건부채권(RP) 매입 지원으로만 언급됐다. 지원의 핵심 주체는 산은과 기은이었다. 채권시장안정화펀드 등 회사채 및 기업 지원엔 산은이, 소상공인와 중소기업 신용 지원은 기은이 주도적 플레이어로 나서는 구조다. 이들 국책은행은 증권시장안정펀드에도 2조원을 출자하기로 했다.

      한국은행은 일단 발표된 대책의 절반 수준에 대해 유동성을 지원키로 했다. 방식은 담보대출이 언급된다. 한은 금융통화위원회는 지난 12일 산금채, 중금채, 수출입은행금융채권, 주금공 주택담보증권(MBS) 등을 한은 대출 적격담보증권으로 인정하기로 의결했다. 이번 정책에 자금을 투입하는 주체들은 일단 자체재원을 활용하지만, 필요할 경우 한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예컨데, 산은이 산금채를 발행해 이를 담보로 한은 대출을 받아 재원 마련을 할 수 있다.

      한은은 2011년부터 금통위 의결을 통해 적격담보채권을 지정할 수 있게 됐다. 정책적으로 자금을 시장에 공급할 수 있는 폭을 넓혀둔 것이다. 이미 정책적 목적으로 적격담보채권을 지정한 사례도 있다. 2011년 당시 주택금융공사 MBS를 적격담보채권으로 지정해 정부의 안심전환대출을 지원했다.

      다만 이런 식의 지원 방식이 최근 중앙은행이 전면에 나선 미국 및 일본의 방식에 비해 다소 보수적으로 보이는 건 사실이다.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이하 연준)는 현지시간으로 23일 '무제한 양적완화'를 선언했다. 지난주 2500억달러(약 310조원)를 쏟아부어 장기 국채(미국 10년물) 시장 붕괴와 달러 초강세를 가까스로 막아낸 연준이 이번주부턴 신용 리스크 공포와의 전면전을 선언한 것으로 풀이된다.

      일단 연준은 국채와 주택담보증권(MBS)을 무제한 매입하기로 했다. 이미 2500억달러를 투입한 연준은 이번주 국채 매입에 3750억달러(470조원), MBS 매입에 2500억달러를 추가 투입한다. 2011년 유럽 재정 위기 당시 연준은 8개월간 6000억달러(750조원)를 시장에 풀었는데, 이 규모를 이미 2주만에 넘어선 것이다.

      3개의 비상기구도 설립한다. 이 기구들은 각각 발행시장ㆍ유통시장ㆍ자산담보부증권 시장을 지원한다. 이를 통해 투자등급 회사채 및 상장지수펀드(ETF), 학자금ㆍ자동차ㆍ신용카드 대출 기반 자산담보부증권(ABS)을 직접 매입하기로 했다.

      연준이 직접 기업과 증시와 개인에게 신용을 기반으로 자금을 넣어준다는 의미다. 사실상 현대화폐이론(MMT)이 주장하는 무제한 발권에 들어간 모양새다.

      일본은 이미 2010년부터 중앙은행인 일본은행(BOJ)가 질적완화 수준의 자금 투입을 집행하고 있었다. 글로벌 증시가 급락한 19일 일본은행은 도쿄증시에 상장된 ETF를 2016억엔(약 2조3000억원)어치 매수했다. 2010년 이후 일일 매수규모로는 사상 최고였다.

      일본은행은 이미 CP 2조2000억엔(약 25조원), 회사채 3조2000억엔(약 37조원)의 지원한도도 설정해두고 있다. 기업의 신용이 경색되지 않도록 자금을 투입할 제도적 기반이 2010년부터 마련돼있었다는 것이다.

      코로나 펜데믹 이후 규모를 더욱 확대할 가능성도 열어뒀다. 일본은행은 지난 19일 ETF에 대해 연간 6조엔(약 68조원)의 매입한도에 구애받지 않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이런 사례를 지켜본 금융권에서는 한은이 미국이나 일본처럼 CP와 회사채, 나아가 ETF를 직접 매입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요구를 내놓고 있다.

      한은은 일단 금융권의 요구에 난색을 표하고 있다. 제도적으로 불가능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한국은행법 제79조는 민간이 발행한 채권의 매입을 금지하고 있다. 제68조는 공개시장에서의 매매대상 증권을 사실상 국채ㆍ은행채 정도로 한정하고 있다.

      발권 원칙상 정책 수행 과정에서 손실 위험을 떠안아서도 안된다는 게 한은의 입장이다. 일본의 경우 일본은행이 매입한 ETF의 손익분기점이 닛케이225지수 1만9000대 중반으로 추정되는데, 지난 19일 1만6000대까지 지수가 하락하며 적자 수지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이를 해소하려면 한은법 개정 등을 포함한 정치적 뒷받침이 있어야 하는데 4월15일 국회의원 총선거 전까지 국회가 움직여주기 기대하는 건 힘들다는 평가가 많다. 미국 역시 법률상 정부의 지급보증이 있어야 연준이 회사채를 매입할 수 있다. 긴급기구 3곳도 연준의 발권이 아닌, 재무부의 환율안정기금 300억달러를 기초 재원으로 삼기로 했다.

      한은이 범위 내에서 최선의 움직임을 해주고 있다는 시각도 없진 않다. 적격 담보대출채권 확대로 사실상 발권력 지원에 나선 게 대표적이다. 또 한은이 채권시장 안정을 위해 국채 직매입을 실시한 건 2008년, 2016년 이후 처음이다. 증권사 등 비은행기관 대상 RP 매입 결정도 2008년 이후 처음이다. 지난 16일 긴급 금융통화위원회 역시 2008년 이후 처음이며, 기준금리를 0%대로 설정한 건 사상 최초다.

      문제는 결국 전 세계가 대공황 이후 처음 겪어보는 위기를 눈 앞에 둔 상황에서 단기ㆍ우회적 지원으로 신용경색과 기업 줄도산, 금융회사 건전성 악화를 막아낼 수 있느냐로 모아진다. 한은 역할론이 계속 언급되는 이유다.

      한 증권사 연구원은 "원화(KRW)의 위상이 달러화나 엔화보다 낮기 때문에 환율과 외환보유액을 고려하면 한은이 직접 대규모 발권에 나서는 건 쉽지 않다"며 "일단 정부 대책은 산은, 기은, 신보 등이 중심이 돼있는데, 향후 코로나19 확산이 지속되면 한은의 직접 역할론이 다시 부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