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난처' CP 시장으로 간 대기업들, 올해 조달계획 새로 짜야
입력 2020.04.23 07:00|수정 2020.04.24 10:16
    A1 상위 10개 기업이 CP 발행량 절반 차지
    '숨통' 찾아 단기 조달 찾는 정유·유통업 등
    상반기 내 조달 계획 재검토 필수 요소
    채안펀드·신용도 관리는 주요 과제로
    • 코로나 사태가 기업들의 자금조달 지형을 바꿔놨다. 회사채 발행이 부담스러운 상황이 연출되면서 지금까지 단기금융시장에 나서지 않았던 기업들도 기업어음(CP) 발행에 적극 나서고 있다. 이벤트 성격이 강한데다가 자금조달 구조가 단기화한만큼 상반기 중 자금조달 계획 수정이 기업들의 주요 과제로 부상했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코로나가 본격화한 지난달부터 최근까지(3월2일~4월17일) 일반기업들의 CP 발행 총량은 12조466억원에 달했다. 지난달 초부터 이미 1조8000억원 이상을 찍어내던 주간 발행량이 월말에 접어들며 2조원을 넘어섰다. 이중 A1으로 구성된 상위 10개 일반기업의 발행 총량이 52.7%(6조3515억원)을 차지해 증가세를 견인했다.

    • 눈에 띄는 점은 정유·에너지사들의 대규모 CP 발행이 줄을 이었다는 것이다.

      SK에너지와 SK이노베이션은 같은 기간 1조5750억원의 CP를 발행했다. 현대오일뱅크(8300억원), GS칼텍스의 모회사 GS에너지(1900억원)를 포함해 정유업종은 단일 산업군 중 발행이 가장 두드러졌다. 특히 SK에너지는 매주 600억원에서 2700억원 사이의 CP를 찍어내며 일반기업 중 발행량이 가장 많았다.

      통상 정유사들은 원유 도입 시기를 제외하고는 높은 신용도를 바탕으로 회사채 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한다. 하지만 회사채 시장에 공백기가 발생했다. 단기차입금 증가 리스크를 감수하더라도 CP 발행으로 자금조달 방식을 돌릴 수밖에 없게 됐다.

      한 증권사 정유 담당 연구원은 "정유사는 조단위 설비투자에 대한 부담감이 큰 상황이지만 재고평가손익과 정제마진의 이중고 속에 현금창출 여력은 줄었다"라며 "차입금 상황 대비 단기 현금 융통 차원에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평가했다.

      발행시장의 변화는 유통기업들에도 영향을 끼쳤다. 유통사는 잦은 거래가 발생하는 사업 특성상 기존에도 단기물 조달이 활발했다. 하지만 최근엔 코로나 소비불황으로 인해 실적이 쪼그라들며 자금 융통 압박이 더욱 커졌다.

      롯데그룹의 코리아세븐과 롯데쇼핑은 최근 7주간 각각 5400억원과 3700억원의 CP를 발행했다. 호텔롯데(2250억원)와 롯데지주(5863억원)의 발행량을 합치면 1조7000억원을 넘어선다. 이외에도 CJ대한통운(8100억원), 커머스사업을 보유한 CJ ENM(3400억원) 등 유통 유관기업의 발행량도 두드러졌다.

      철강과 조선업계 역시 고민이 큰 상황이다. 글로벌 수요 감소 자체가 가파르게 꺾여 유동성 확보가 절실한 만큼, 현대제철(3000억원)과 같이 미리 자금 확보에 나선 곳도 나타나고 있다. 다만 CP 발행 시 수주 평가에서 주요 지표로 활용되는 부채비율이 오를 수 있어 쉽사리 결단을 내리긴 어렵다. 상당수가 앞서 진행했던 유상증자 등 기존 조달을 바탕으로 ‘버티기’에 나서는 모양새다.

      한 대형 조선사 관계자는 "조선업은 수주가 있어야 유동성이 확보되는 산업인데, 현재 코로나로 글로벌 발주 자체가 줄었다. 다른 산업군처럼 공장이 멈춰선 정도까진 아니지만 상황이 좋다고 말하긴 어렵다"며 "올해를 약간은 우호적으로 내다보고 조달 전략을 짰었는데, 불확실성을 고려해 재검토 중에 있다"고 전했다.

      현재의 시장 변화가 기업들의 자금경색으로까지 이어질 확률은 적다는 분석이다. 발행에 나선 기업들의 신용도 자체가 높을뿐더러, 지난달 평균 1.6%대에서 이달 초 2.3%로 급등하던 CP금리(91물 기준)가 채안펀드 가동 이후 2.1% 이하로 안정세를 찾아가고 있다. 금리를 얹어주고도 ‘차환 위기론’까지 대두되던 지난달과는 달리 A1등급을 중심으로 한 투자심리는 회복되는 분위기다.

      한 신용평가사 관계자는 ”우량기업들이 단기물에 몰려가고도 소화가 안되는 환경이라면 위기라고 표현할 수 있겠지만 채안펀드가 자금을 투입하기 시작하면서 차환 부담이 줄었다“며 ”신용도만 안전하다면 투자자들도 현재 단기물 금리가 충분히 매력적일 것이기 때문에 조달 방식 자체가 손해보는 전략은 아니다“고 말했다.

      다만 단기 조달 구조를 계속 유지할 수는 없다. 코로나라는 특수한 상황을 전제로 지금의 CP 발행 상당수가 91일물임을 감안하면 하반기에는 새로운 리파이낸싱 전략을 가동해야 하는 상황이다. 기업들이 그간 장기로 대응해 온 일반 영업자금을 단기로 조달하고, 추후 이를 상환하기 위한 용도로 회사채 발행에 나설 가능성도 커졌다.

    • 이 가운데 신용등급 수성은 전략 수립의 주요한 고려 요소가 될 예정이다. 최근 CP 발행에 나섰던 주요 정유와 유통 기업의 신용등급 전망들은 하향 조정을 거듭하고 있다. 국제 신용평가사 무디스 역시 SK이노베이션과 SK종합화학의 등급 전망을 '부정적'으로 조정하기도 했다. 물론 채안펀드의 '훈풍' 탓에 GS(2000억원), 호텔신라(1100억원) 등 조금씩 수요예측 시도가 이어지는 분위기다. 하지만 앞서 채안펀드의 투자기준선(AA-이상) 탓에 수요예측에 실패한 한화솔루션 사례처럼 상반기 내 새로운 자금 전략을 고심 중인 기업에 미매각 우려는 여전히 부담이다.

      일각에서는 기업들이 이르면 다음달부터는 차입금을 장기화하는 식의 발행을 상당수 진행할 가능성을 점치기도 한다. 코로나 진정 추이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현재 기업들의 조달 수요가 상당한 만큼 일부 회사채 수요예측들이 성공적으로 이어질 경우 3년물 회사채부터 원래의 발행 규모를 빠르게 되찾아나갈 것이란 전망이다.

      한 증권사 크레딧 연구원은 "최근 흐름을 보면 3년물 회사채 금리보다 3개월~1년물의 CP 금리가 더 높은 상황이 나오는데, 금리 부담이 더 높은 쪽에 발행이 몰리는 셈이다. 이는 조달 시장이 '꼬였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며, 장기적으로 진행될 수 없는 구조"라며 "우선 5~6월 내에 코로나 사태가 진정되고 조달시장이 조금이라도 풀린다면, 기업들도 금리에서 다소 손해는 보더라도 다시 장기물 발행을 시작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