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책은행 주주 맞을 대한항공, 정부 부인에도 드리우는 국유화 그림자
입력 2020.05.04 07:00|수정 2020.05.07 09:35
    주식전환 가능 영구채로 3천억 지원…예상 지분율 10.8%
    지원 의지 확인됐지만…주주 참여시 기존 경영진 부담 확대
    경영권 분쟁 한진칼, 대한항공 증자금 마련 가능성 불투명
    정부 국유화 아니라 선 긋지만…”위기 장기화 시 배제 못해”
    • 국책은행들이 대한항공에 긴급 유동성을 지원하며 향후 주식도 보유할 수 있다는 뜻을 내비쳤다. 정부의 지원 의지가 늦게나마 확인됐지만 경영권 향방의 불확실성은 커졌다. 위기 상황이 계속되면 공적 자금이 추가로 투입돼야 하고 정부나 국책은행이 경영권 등 반대 급부를 확보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은행이 실제로 주식을 가지게 되면 항공사 국영화의 신호로 비춰질 것이란 예상이 나온다.

      지난 24일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은 대한항공에 1조2000억원을 지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7000억원 규모 화물운임채권 ABS를 인수하고, 운영자금 2000억원을 지원한다. 3000억원은 주식으로 전환가능한 영구채 인수대금으로 쓰기로 했다.

      산업은행은 주식 전환 시 지분율이 10.8% 정도로 추산된다고 밝혔다. 대한항공 시가총액은 최근 1달간 1조8000억원 안팎을 오갔고, 1조원대 유상증자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유상증자 후 3000억원의 가치를 산출한 것으로 보인다.

      대한항공 입장에선 국책은행이 주주로 들어오게 되면 사업의 불확실성이 크게 줄어든다. 항공사를 국유화하거나 수십조원을 쏟아붓는 해외에 비할 수준은 아니지만 정부의 지원 의지는 확인됐기 때문이다. 관계사와 안정적으로 거래할 수 있고, 고용의 안정성도 높아진다. 위기 시 정부의 지원을 다시 기대할 만하다. 정부로서도 주식이 헐값이 되도록 방치하기 쉽지 않다. 그간 국책은행 아래서 연명한 기업들이 많았다.

    • 회사의 경영 자율성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채권단이 자금줄만 쥐고 있어도 껄끄러운데 주주로까지 들어오게 되면 눈치를 더 봐야 한다.

      대한항공의 최대주주는 한진칼(작년말 지분율 29.96%)이며, 정석인하학원 등 우호 지분을 합해도 30%를 넘는 수준이다. 반면 국책은행들의 잠재 지분율은 10% 수준이고, 정부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은 국민연금도 10% 내외의 지분율을 유지하고 있다. 당장 국책은행과 국민연금이 경영권 지분을 쥐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기존 최대주주를 견제하기엔 충분하다.

      한진칼이 대한항공 유상증자 대금을 마련하지 못했을 경우엔 압박이 더 심해진다.

      회사는 유상증자도 유동성 확보 방안의 하나로 검토 중이란 입장이다. 시장에서는 유상증자를 이번 지원의 전제 조건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대한항공 증자에 참여하려면 한진칼도 자금을 마련해야 하는데, 주주가 조원태 회장 측과 KCGI연합으로 첨예하게 갈려 있어 협치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한진칼이 자금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로 증자가 진행되면 지분율이 희석될 수밖에 없다. 대한항공은 2015년(5000억원)과 2017년(4500억원) 주주배정 후 실권주 일반공모 방식으로 증자를 실시한 바 있다.

      증자까지 순탄하게 마무리한다 쳐도 불확실성은 남는다. 금융지원으로 당장은 숨을 돌렸지만 결국은 모두 대한항공이 갚아야 할 빚들이다. 코로나 사태로 인한 타격은 언제까지 이어질 지 예단하기 어렵다. 위기가 길어지고 자금 소요가 많아질수록 한진칼보다는 국책은행들의 우위가 뚜렷해질 가능성이 크다.

      국책은행들이 이번엔 대주주 일가의 희생 없이 지원하지만, 계속 돈을 들이붓게 되는 경우엔 주식 담보 설정 등 보다 강화된 조건을 바랄 수밖에 없다. 오너 일가의 경영권 분쟁이 있던 회사에 대해 특혜를 준다는 시선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정부는 항공업 등 기간산업 지원 시 주식을 취득하려는 것이 경영을 간섭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 기업가치가 상승할 경우 주식을 처분해 그 이익을 국민과 공유하기 위한 것이란 입장이다.

      그러나 미증유의 비상시국에선 상황 변화에 따라 방침이 달라질 가능성이 크다. 당장 내놓은 영구채 지원안만 해도 불투명한 부분이 많다. 일단 필요한 자금 규모를 확인한 후 거꾸로 필요 항목을 나눠 분배한 형국이다. 영구채 형태나 구체적 발행 조건도 검토하고 있다. 국책은행들은 예상 지분율에 대해 현재로서의 추산이라며 조심스러운 분위기다.

      해외에선 벌써 항공사를 국유화하는 사례가 나온다. 미국 항공업계도 울며 겨자먹기로 정부의 이익 공유형 지원 모델을 받아들였다.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 주력 품목을 운송하는 기간산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 정부가 항공업의 위기를 두고 볼 수만은 없다. 코로나가 장기화하면 항공산업 국유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진칼 경영권 분쟁의 승자가 대한항공을 거느리는 것은 아닌 구조가 만들어질 수 있다.

      항공업계 관계자는 “일단 지금까지는 당장 필요한 유동성을 어떻게 마련할지 큰 그림만 그려진 상황이고 세부적인 지원 조건은 협의하고 있다”며 “국책은행들은 기업을 떠안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겠지만 주식을 실제로 가지게 된다면 항공사가 국영화할 것이란 인식이 강해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