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과 한진, 두 기업 대하는 정부의 사뭇 다른 태도
입력 2020.05.08 07:00|수정 2020.05.12 09:53
    • ‘쓰러지는 기간산업을 만들지 않겠다’고 공언한 정부는 두산과 한진그룹에 대해 수 조원의 자금지원을 확약했다. 국책은행(산업은행·수출입은행) 탈원전과 코로나 등 이유를 막론하고, 급한 상황에 처한 두 그룹에 ‘선(先)자금지원, 후(後) 상환방안 검토’의 방식을 택했다.

      사실 화장실 들어갈 때 마음과 나올 때 마음은 다르다고 했다. 그러기에 채권자는 빌려준 자금을 돌려받을 방법을 명확하게 밝힐 것을 요구한다. 또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해 회수율을 극대화 하는게 상식적이다. 아직까지 두 그룹의 경영개선 계획은 확정되지 않았고, 다소 여유(?)를 갖고 만들어 낼 개선방안이 얼마나 현실적일지 또는 실효성 있을지는 예단하기 어렵다.

      두 기업의 다급함을 차치하고, 한진과 두산그룹에 국책은행의 지원방식이 다소 다르다는 점은 눈에 띈다.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은 지난달 24일 한진그룹에 1조2000억원을 지원하기로 확정했다. 구체적으로 운영자금 2000억원, 자산유동화증권(ABS) 인수 7000억원, 전환권을 가진 영구채 인수 3000억원 등이다. 코로나 여파로 휘청인 국내 항공사들은 3월부터 정부의 지원을 끊임없이 요구했지만 최종 지원안을 이끌어 내기까지 두 달이 넘는 기간이 소요됐다.

      지난달 초까지만해도 은성수 금융위원장이 “대기업이 국책은행의 도움을 받으려면 대주주 자구노력이 전제돼야 한다”고 밝히면서 정부와 한진그룹의 입장차는 좁혀지지 않는 듯 했다.

      힘겹게 자금지원을 이끌어낸 한진그룹이 꺼낸 카드는 정부와의 이익 공유다. 일시적인 자금 경색이 풀리면 채권단이 전환권을 가진 영구채 3000억원을 주식으로 전환해 이익을 공유하는 방식이다. 채권단은 배당을 통한 재원 확보, 또는 주식을 시장에 매각하는 방식도 고려할 수 있다. 주식으로 전환할 수 있는 규모는 대한항공 주식 약 11%로 현재 시장가치로 2000억원, 1년전 가치로는 약 4000억원 수준이다.

      이 외에 가용한 자산을 매각해 현금화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한진그룹은 올해 2월, 서울 종로구 송현동 부지, 인천 중구 을왕동 왕산레저개발 지분, 제주 파라다이스 호텔을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물론 해당 방안들이 정부의 자금지원을 받기 위한 자구안으로 보기는 어렵다. 매각 성사 가능성도 예단하긴 이르지만, 어떤 방식으로 현금을 확보하겠다는 최소한의 시그널을 시장에 내비쳤다는데 의의가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진그룹은 최근 송현동 부지 매각을 위한 주관사(삼정KPMG-삼성증권) 선정을 마쳤고, 최근엔 ㈜한진의 렌터카 사업부 매각을 완료하기도 했다.

      주식 확보, 자산매각 추진 등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한 한진그룹과 비교하면 채권단의 두산그룹 지원 조건은 다소 느슨해 보인다.

      지난 3월26일, 두산중공업은 이사회를 열어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에 1조원의 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당시 두산그룹이 자금지원을 요청 했단 표현 대신, 자금지원을 받았다고 공시하는 해프닝이 발생하기도 했다. 정부의 자금 지원은 실제로 이튿날 확정됐다.

      일사천리로 진행된 1조원의 자금지원 이후, 2주가 채 지나지 않아 수출입은행은 6000억원 규모의 외화공모채권을 대출로 전환해 주기로했다. 총 1조6000억원. 여기에 지난달 두산그룹이 자구안을 확정하자, 채권단은 ‘사업개편 방향과 계열주 및 대주주 등 이해당사자의 고통분담과 자구노력이 포함돼 있어 자구안을 수용하기로 결정한다’며 추가 지원을 고려한다고 밝혔다. 추가 지원이 현실화 할 경우 두산그룹에 지원하는 국책은행 자금만 2조4000억원이 넘는다.

      2조원이 넘는 지원을 받으며 두산그룹이 투자자들에게 밝힌 재구구조개선 방안은 단 세줄에 불과했다.

      ㈜두산은 두산중공업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다음 사항을 검토할 예정입니다.

      - 자산매각

      - 유상증자 참여 등

      그룹은 보도자료를 통해서 3조원대의 자구안을 마련하겠다고 했지만, ‘언제까지 어떤 방식으로 현금을 마련하겠다’는 언급은 없었다.

      재계 한 관계자는 “두산그룹의 전형적인 ‘화법’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며 “수십~수백가지의 가능한 시나리오를 만들어 놓고 상황에 따라 취사선택하는 방식으로 자구안을 만들어 냈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투자자들이 오히려 애가 탔다. 매각 가능한 모든 자산을 펼쳐 두고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매각 대상이 거론될 때마다, 잠재 후보자가 물망에 오를 때마다 계열사들의 주가는 널뛰기를 반복했지만 두산그룹은 침묵했다.

      두산그룹이 두산솔루스·두산메카텍·두산건설·두산산업차량 등 매각 후보 자산들을 진성으로 매각할 의지가 있는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하다. 밝힌 바가 없으니 ‘진성 매각’이란 표현이 어울리진 않는다.

      사실 정부의 자금지원 직전까지는 두산그룹이 진정성 있게 현금확보에 힘쓴 것은 맞다. 당장 만기가 돌아오는 채권을 막을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잠재 매수자들과 두산메카텍, 클럽모우, 두산솔루스, 두산타워 등의 매각 협상을 진행했고 상당한 진척이 있기도 했다. 현재는 매각 후보군 대부분은 잠재 매수자들과 두산그룹의 눈높이가 상당히 차이나는 것으로 전해진다.

      시장의 기대와 달리 두산그룹이 두산인프라코어, 두산밥캣 등 알짜 사업을 ‘급매물’로 내놓을 지도 미지수다. 사실상 친족 기업인 두산그룹이 내놓을 자구안은 가업 승계와 후계구도, 지배구조개편과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렵다. 오너일가의 현실적인 이야기를 떠나서, 그룹의 캐시카우를 끌어안고 있다면 훗날을 도모하겠단 ‘명분’을 만들 수도 있다. 팔겠단 공언을 하지 않아도 급한 불을 껐으니 가능한 일이다. 개인 또는 중소기업이라면 상상하기 힘든 고(高)자세이기도 하다.

      투자은행(IB) 업계 한 관계자는 “그룹이 겪고 있는 현재의 위기를 오롯이 탈원전을 주장한 현 정부에 책임을 물으려 하는 경영진, 그리고 두산그룹의 위기에 대한 책임론을 회피하려는 정부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지원방안이다”라며 “그룹 차원에서 상당히 여유를 찾은 것을 비쳐볼 때 투자자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고강도 자구안이 나올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