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차입' 경영의 역설…코로나 지원 우선순위 밀리는 기업들
입력 2020.05.22 07:00|수정 2020.05.21 17:53
    코로나 여파로 현금 말라가는데
    은행 평가 근거 없어 지원서 밀려
    주식투자 유치·회사채 인수 난항
    대한항공 등 빚 많던 기업은 '여유'
    • 코로나 장기화로 무차입 기조를 이어온 기업의 고심이 깊어지고 있다. 은행이나 자본시장과 접점이 없었던 터라 지원을 요청할 근거가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지원을 원하더라도 심사 절차를 넘기 어렵거나 지연되는 사례가 나타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저가항공사(LCC) 티웨이항공은 대표적인 무차입 경영 기업이다. 2016~2018년엔 총차입금이 0원, 순차입금은 마이너스 상태였다. 지난해 새 회계기준(IFRS16 Leases) 적용으로 운용리스 관련 부채가 늘었지만 작년말 현금성자산이 1827억원에 달해 영업엔 큰 문제가 없었다.

      올해 코로나가 확산하며 현금이 빠르게 소진되기 시작했다. 선수금을 대거 돌려줘야 했고 인건비나 리스료가 빠져나가며 연내 현금이 마를 것이란 우려가 나왔다. 마찬가지로 무차입 경영을 해왔던 최상위지배사 예림당(작년말 총차입금 27억원, 현금성자산 424억원)의 부담도 커졌다.

      재무구조가 안정된 회사가 일시적인 위기를 겪은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유동성을 마련하기는 녹록지 않은 모습이다. 보통 때라면 금융비용 절감 측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겠지만 이례적인 위기 상황에서는 썩 득이 되지 않고 있다.

    • 정부는 2월 LCC에 산업은행을 통해 3000억원의 긴급 융자를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지난달까지 에어서울·에어부산 544억원, 제주항공 400억원, 진에어 300억원, 티웨이항공 60억원 등 1304억원이 집행됐다. LCC 9개사 중 3곳은 영업을 준비 중이고, 제주항공의 이스타항공 인수금융 1700억원 지원은 별도다. 티웨이항공의 지원 규모가 가장 작았던 셈이다.

      티웨이항공이 안정적으로 현금을 보유하고 보수적인 운영을 했기 때문에 다른 곳보다 여유가 있던 면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은행이나 자본시장과 거래가 없어 지원할 근거 자료를 마련하는 데 차질을 빚었을 것이란 평가가 나온다.

      돈을 줘야 하는 입장에선 엄중한 시기에 거래처가 아닌 곳을 먼저 신경을 쓰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가뜩이나 이번 위기에 편승해 유동성을 채워 넣으려는 수요가 많은 상황이다. 한정된 재원이라면 아무래도 사정을 잘 아는 곳에 우선 지원이 이뤄질 수밖에 없다. 꾸준히 신용카드나 은행 대출을 활용해온 사람의 신용등급이 전혀 빚을 끌어쓰지 않은 사람보다 높고, 대출을 일으킬 때도 유리한 것과 비슷한 이치다.

      이런 배경 때문에 과거 경제위기 때도 기업 지원 정책의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되곤 했다. 국책은행이 추가로 돈을 빌릴 필요가 없는 우량 고객사에 저리로 돈을 빌려주고, 그 돈을 다시 예치해 높은 이자를 지급하는 사례들이 있었다. 국책은행 입장에선 자금 집행 실적을 채우면서도 부실 우려가 적다. 그러나 정작 필요한 곳엔 돈이 흘러가지 못하고 국책은행으로서도 손실이 나는 폐단이 있었다는 지적이다.

      한 국책은행 관계자는 “코로나로 기업들이 어려운 시기기 때문에 흠을 잡아 차별하려 하지는 않을 것”이라면서도 “기존 거래처가 아닌 곳은 회사의 사정을 속속 알기 어렵기 때문에 신규 여신을 내주기 어렵거나 승인 심사가 늦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정부 관계자는 “개별 기업을 언급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며 “조속한 LCC 지원을 위해 추가적인 심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자본시장과 접점이 없던 기업들은 주식(Equity) 성격의 투자금을 유치하는 데도 애를 먹을 수밖에 없다.

      잠재 투자자 입장에선 기업이 여신을 먼저 늘린 후 투자하는 편이 불확실성이 제거되고 투자의 안정성이나 수익성에도 득이 된다. 반대로 정부의 여신 지원이 이뤄지기 전이라면 주식이나 메자닌을 확보하는 데 주저할 수밖에 없다는 평가다.

    • 이달 본격 가동되는 회사채 신속인수제의 수혜를 온전히 받는 것도 어려울 수 있다.

      회사채 신속인수제는 만기 도래 회사채를 사모사채 방식으로 차환해주는 기업 유동성 지원 제도다. 회사채의 20%는 기업이 자체 상환하고 나머지는 산업은행이 총액 인수한다. 산업은행 인수분 중 절반은 채권은행(40%)과 금융투자업계(10%)가 기존 여신 비율대로 나눠 재인수하게 된다. 회사채를 발행하면서 일반 여신이 없는 업체는 드물겠지만, 어찌됐든 아무래도 신용 여신이 있는 업체들이 우선 수혜를 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다른 국책은행 관계자는 “회사채 신속인수제는 결국 채권은행이 채권 비율에 따라 지원하는 것이다 보니 기존에 신용 여신이 있는 업체들이 우선 지원받을 가능성이 크다”며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은행 익스포저가 없던 회사는 정부 지원에서 밀리는 구조”라고 말했다.

      정작 차입 규모가 크고 재무구조가 어려워 보이던 대기업들은 상대적으로 유동성 부담을 덜 느끼고 있다.

      정부는 대한항공에 1조2000억원, 아시아나항공에 1조7000억원을 새로 지원해주기로 했다. 두산중공업에도 2조4000억원 지원 계획을 밝혔다. 국가 주력 제품의 수출 창구이고 국내 전력 관리에 필수적이라는 상징성이 있기 때문에 향후 상환 능력보다는 당장 숨통을 틔워주는 것이 중요하다. 지원을 하지 않았다간 기존 여신까지 송두리째 날릴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위기 때마다 새로운 ‘대마불사’ 사례가 나타나는 형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