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전이 팔 땐 최고가, 한진이 팔 땐 반값…갈등 키우는 서울시장의 '태평성대'
입력 2020.06.01 07:00|수정 2020.06.02 09:56
    • 박원순 서울시장은 현재를 갈등이 없는 ‘태평성대(太平聖代)’라 평가했다. ‘어진 군주가 다스리는 태평한 시대’를 선언한 이튿날, 한진그룹이 갈등의 중심에 섰다.

      서울시는 27일 도시·건축공동위원회를 개최해 송현동 대한항공 부지를 공원화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공동위원회는 송현동 부지를 빠른 시일 내 공원으로 지정하고 대한항공으로부터 매입하는 방안에 적극 찬성했다. 서울시는 자문 의견을 반영, 올해 내 해당 부지를 문화공원으로 결정할 계획이다.

      불안불안한 재무구조를 유지해오던 한진그룹은 올해 초 알짜 자산들을 내다팔기로 결정했다. 코로나 사태로 항공업 업황이 최악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정부의 자금지원과는 별도로 자산을 매각해 현금을 확보하겠단 전략이다. 희망퇴직, 무급휴직을 시행하고 있는 대한항공의 사정은 너무 잘 알려져 있다.

      사실 현재 대한항공의 사업적 위기를 항공 업황과 코로나의 여파로 치부하는 것은 무리다. 전국을 떠들썩하게 하며 돌이킬 수 없는 평판리스크를 남긴 오너일가, 치솟는 부채비율과 재무부담을 관리하지 못한 경영인들의 과오는 분명하다.

      그러나, 적어도 현 시점만 두고본다면 그룹이 살아나려는 의지는 확고하다. 정부의 자금 지원을 대가로 대한항공의 지분을 내줬고, 주력인 항공운송 사업을 제외한 사업부 정리 작업을 시작했다. 외풍에 시달리며 그룹의 의사결정 과정도 과거에 비해선 투명해질 것으로 기대한다.

      그룹 재무구조개선의 핵심은 단연 송현동 부지이다. 한진그룹은 2008년 해당부지를 약 3000억원에 사들였고, 현재 가치는 약 5000억원 이상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한진그룹도 해당부지를 매각해 5000억원 이상을 확보하겠단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매각을 추진 중인 제주도의 호텔 2곳, 전면 재검토 중인 미국 호텔 사업을 정리해도 이정도 규모의 현금을 확보하긴 어렵다. 서울시에 몇 남지 않은 금싸라기 땅을 확보하려는 경쟁이 치열해 진다면 5000억원을 훌쩍 넘는 현금의 확보도 가능할 것이란 평가가 나왔다.

      서울시의 공원화 발표는 이 같은 계획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인·허가권을 가진 서울시가 허가를 내주지 않으면 해당 부지는 다른 용도로 개발하기 어렵다. 과거 한진그룹도 송현동 부지를 복합문화단지로 개발할 계획을 세웠으나 무산됐다.

      서울시의 개입 의지가 확실해진만큼 사실상 높은 값을 받기는 어려워졌다.

      공개경쟁입찰을 진행한들 수익 사업을 진행하기 어려운 공원부지에 수천억원을 베팅할 투자자들을 찾긴 쉽지않다. 수의 계약 형식으로 진행해 새주인을 찾는다면, 추후 경영진의 배임 문제도 불거질 수 있다. 이도저도 안된다면 서울시가 제값을 주고 사주면 되겠지만, 서울시는 해당 부지를 약 2000억원 정도로 평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송현동 부지 매각은 과거 삼성동 한전부지 매각과는 매우 다른 양상이다.

      정부는 지난 2014년 한국전력이 사용하던 삼성동 사옥 부지(7만9341㎡)를 현대차그룹에 매각했다. 총 금액은 10조5500억원이었다. 삼성그룹과 현대차그룹이 맞붙었고, 공시지가는 물론이고 인근의 시세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가격이 형성됐다.

      입찰 당시 지켜진 명확한 원칙은 ‘최고가’ 매각이었다. 최고가 매각 과정에서 정부는 상당한 재원을 확보할 수 있었고, 서울시는 현대차 기부채납을 통한 자산 확보와 세수 증가 등 손해볼 것 없는 장사를 했다.

      정부는 대한항공을 살리기 위해 1조원이 넘는 혈세를 투입했다. 송현동 부지 매각이 한진그룹의 오너일가에 흘러가는 돈이라면 모를까, 장기적으로 본다면 상당 부분 정부의 투자금 회수에 쓰일 가능성이 높다. 결국 시장논리에 맡기면 단순해 진다. 서울시가 반드시 매입해야하는 명분이 선다면, 제 때 제 값을 주고 사오면 된다. 그러면 사유재산침해 논란에서도 자유로워진다.

      기업들의 상황은 박 시장이 언급한 태평성대와는 정반대이다. 코로나의 여파가 재무제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다음 분기부턴 어려움을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정부가 돈을 풀어 기업에 산소호흡기를 대는 것도 한계가 있다. 기업들의 자발적인 사업재편, 구조조정 없이는 빚으로 빚을 막는 형국을 벗어날 수 없다. 서울시장의 임기 막바지, 대통령 선거가 2년여 앞으로 다가온 상황. 치적을 위해 기업이 희생하는 일이 있어선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