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당국의 ‘초법적 결단’ 압박이 불편한 금융사들
위상호 기자 | wish@chosun.com | 2020.07.29 07:00
Edited by 현상경 부장 | hsk@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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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펀드·키코 등 배상 권고에 금융사 고심
착오 취소 시 배상·구상 여부 등 쟁점 많아
시효 지나고 근거 없는 악성 민원도 증가
‘남의 돈으로 민원 처리한다’ 비판 목소리도

금융회사들이 감독당국의 민원 처리 방식에 난색을 표하고 있다. 당국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일단 돈은 돌려주고 보자’ 독려하지만 금융사들은 법적 근거가 모호하다며 머뭇거리고 있다. 경영의 앞날을 고심하는데 시간을 써도 부족할 때 사고 처리에 발목이 잡혔고, 배임 논란이 불거질 가능성도 감수해야 한다. 감독당국의 책임회피, 행정편의주의적 발상이 계속된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우리은행은 24일 이사회를 열어 지난달 분쟁조정위원회(분조위)가 권고한 라임자산운용 무역금융펀드 100% 배상안에 대해 논의했다. 소비자 보호와 신뢰 회복 명분엔 공감했지만 수락 여부 결정 시기를 다음 이사회 일정까지 늦춰달라고 신청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앞서 21일 하나은행도 같은 결정을 내렸다.

분조위는 배상 권유의 근거로 판매사가 사실과 다른 설명을 해 투자자의 착오를 유발했다는 점을 들었다. 즉 민법상 ‘착오에 의한 계약취소’다. 착오에 의해 계약을 취소하면 부당이득을 돌려줘야 하는데 무엇이 부당이득인지, 부당이득이 얼마나 남았는지 다툴 여지가 있다. 판매사가 얻은 이득이라면 수수료 정도인데, 일단 전액을 돌려주라는 꼴이다.

보상을 하면 현실적으로 구상권을 행사할 대상은 신한금융투자 뿐이다. 판매사들은 라임자산의 다른 펀드는 고객에게 투자금 일부를 보상해주기로 했다. 그러나 그 때는 어느 정도 자산 현금화 계획이 섰기 때문이다. 무역금융펀드는 자금 회수 가능성이 거의 없다. 향후 분쟁을 통해 돈을 돌려받으려 하겠지만 일단 전액을 돌려주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다.

상황이 이러니 권광석 우리은행장도 고심이 깊은 것으로 알려졌다. 라임사태 자체는 권 행장의 책임으로 보긴 어렵다. 그러나 1년 임기로 은행을 이끌고 있는데, 무언가 보여줘야 할 시기에 사고 처리도 지지부진하니 속이 탈 수밖에 없다. 근거 없이 돈을 돌려줬다 배임 논란이라도 불거지면, 그 책임에선 자유롭기 어렵다. 이는 임기 1년이 채 남지 않은 지성규 하나은행장도 크게 다르지 않다.

금융업계 관계자는 “권광석 행장은 금감원과 대립각을 세우는 것을 원치 않고 신한금융투자에 구상권 청구만 확실히 할 수 있다면 투자금을 돌려주자는 생각을 갖고 있지만 쟁점이 많아 결정을 내리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금감원은 작년 12월 주요 은행에 외환파생상품 키코(KIKO) 불완전 판매의 책임을 물어 피해 기업에 손실액의 일부를 배상하라고 결정했다. 대부분 판매은행이 민법상 손해배상 청구권 소멸시효(10년)가 지났고 대법원 판결까지 난 사안이라 배임 이슈가 있다며 조정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국은 금융신뢰를 회복하자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법적, 논리적 근거가 부족하다보니 ‘포퓰리즘’ ‘무모한 소신’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웠다.

금융업계에선 금감원이 ‘금융 소비자 보호’에만 최선을 다하다 보니 악성, 혹은 근거없는 민원들이 난무한다고 볼멘 소리가 나온다. 다소 억지스러워도 돈을 돌려받는 경우가 있으니 시도를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는 금감원이 원인을 제공한 셈인데, 그 뒤치다꺼리는 항상 해당 금융사들이 도맡아야 한다. 민간 금융사 돈으로 정부가 생색낸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근 보험사에도 황당한 민원이 늘어나는 분위기다. 일례로 한 보험 고객은 일이 생길 때마다 보험금을 잘 받고, 해지해서 환급금까지 받아갔지만 갑자기 과거 보험 서류에 직접 서명하지 않은 것 같다며 금감원에 민원을 제기했다. 보험료 반환청구의 소멸시효(3년)도 지난 상황이었지만 그간 납입한 보험료까지 모두 내놓으라며 강짜를 부렸다.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보험사에 귀책이 있다고 보기 어려웠지만 금감원은 보험사에 민원 처리를 넘겼다. 보험사에 보험료를 돌려주든지 고객을 설득해서 민원을 취하시키든지 알아서 하라고 통보한 것으로 전해진다.

코로나19가 한창 기승일 때에도 보험사들은 골머리를 앓았다. 지난 3월엔 증세가 있거나 의료진이 검사를 권하는 경우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검사비를 부담했다. 즉 이 경우는 개인의 의료비가 발생하지 않고 보험금을 청구할 근거도 없다. 그러나 금감원은 보험사들에 실손의료보험 보험금을 지급하라고 권고해 반발이 불거졌다. 지급할 근거도 없거니와 그 비용이 고스란히 다른 고객에 전가될 수밖에 없었다. 금감원은 논란이 일자 실손보험금을 지급하라 권고한 적 없다며 진화에 나섰다.

한 금융사 관계자는 “금감원은 금융 소비자 편만 들다보니 근거없는 악성 민원이 늘어나는 것 아니겠냐”며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할 거면 법은 왜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2020년 07월 27일 07:00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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