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세에 지장없는 기업에만 큰 소리 친 국민연금
입력 2021.01.11 07:00|수정 2021.01.12 08:57
    대한항공 주총 전날 부랴부랴 수탁위
    ‘반대표’ 행사했지만 영향력 미미
    LG화학·콜마·쌍용 등 주요 주총서 번번이 패배
    대주주와 지분율 격차 큰 기업들서 큰 목소리
    ‘보여주기식’, ‘명분쌓기’ 반대표 행사서 벗어나야 지적도
    • 국내 대표 기관투자가인 국민연금의 의결권이 힘을 못쓰고 있다. 투자자들의 이목이 집중된 기업의 주주총회 주요 안건에 반대표를 행사하며 큰 목소리를 내고는 있지만, 국민연금의 뜻대로 표결 결과가 나온 사례가 거의 없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다. 주로 대주주와 지분율 차이가 큰 기업에 국한해 ‘반대표’를 행사하다보니 나타난 현상이기도 하다.

      국민연금은 주총 표결을 넘어선 주주제안 및 경영진 면담 요청 등 기업가치 재고를 위한 적극적 주주권 행사에는 여전히 소극적이란 평가를 받으며, ‘보여주기식 반대표 행사’,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명분 쌓기’에 급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6일 열린 대한항공의 임시주주총회는 산업은행의 대한항공 자금지원, 즉 아시아나항공 경영권 인수를 위한 필수적인 절차였다. 대한항공은 총 2조5000억원의 유상증자를 통해 아시아나항공 인수자금을 마련하기로 했는데 이를 위해 발행가능한 주식의 수를 늘리는 정관 변경이 필요했다. 정관변경을 위해선 주총 참석 주식의 66.7%의 동의가 필요하기 때문에 주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야 한다.

      임시 주총 전날 국민연금은 기업의 의결권 행사를 결정하는 수탁자전문책임위원회를 열고 정관 변경에 반대표를 행사하기로 결정했다. 국민연금은 지분율을 8.1%로 대한항공의 2대주주다.

      사실 주총 하루 전 주요주주가 찬반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다.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결정한 이사회 날부터 주총 개최까지는 한 달여가 넘는 시간이 있었다. 이미 ‘실사 없이’ 그리고 국책은행 산업은행의 ‘의도’ 대로 진행되는 거래라는 점은 알려질 대로 알려진 사실이기도 했다.

      국민연금은 뒤늦게 ‘아시아나항공에 대한 실사 없이 인수를 결정한 점을 비쳐볼 때 주주가치 훼손 우려가 있다’는 게 반대의 주요 논리로 내세웠다. 주총 통과를 위해 비공식적으로 주주들과 소통한 한진칼, 그리고 소액주주들의 찬성 표결에 힘입어 안건은 무난히 통과했다. 4000억원 규모의 주식을 보유한 2대주주가 중대한 주주가치 훼손을 인지했음에도 회사측과 사전 협의, 더 나아가 주주제안을 통한 거래 방식 변경 등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는 것을 자인한 셈이 됐다.

      이미 투자자들도 국민연금의 반대표 행사가 영향력이 있을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주식 시장은 잠잠했고 한진칼-대한항공 모두 특별한 입장을 내진 않았다. 냉정히 말하면 국민연금의 반대표는 ‘대세’에 지장이 없을 때만 행사한다는 것을 투자자들이 학습효과를 통해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란 평가도 있다.

      투자은행(IB) 업계 한 관계자는 “소액주주도 아니고 대주주로서 아무런 영향력 없는 표를 행사한다는 것은 추후 불거질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한 면피용이란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며 “기관투자가로서 적극적 주주권 행사라는 대의적 명분을 내세우고 있지만, 현실적으론 과거 삼성물산 합병 과정에서 곤욕을 치른 것을 의식하듯 상당히 소극적인 주주의 자세로 일관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수탁위 개최 전일 국민연금은 대한항공 주식을 대거 시장에서 팔아치운 점은 시장의 의구심을 키웠다. 이날 150억원 규모의 연기금 물량이 시장에 쏟아졌는데, 이는 지난해 12월 한달 통틀어 가장 많은 매도 물량으로 기록됐다.

    • 지난해 국민연금이 반대표를 행사한 주주총회에서 안건이 부결된 경우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지난해 주식시장을 뜨겁게 달군 LG화학의 배터리 자회사 분사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LG화학의 배터리 사업부 분사와 관련해 갑론을박이 치열했던 것과 달리 주총은 참석주식의 82.3%가 찬성하며 압도적인 결과가 나왔다. ISS와 글래스루이스, 대신지배구조연구소 등 국내외 주요 의결권 자문사들의 ‘찬성’ 권고에도 나홀로 ‘반대’ 의견을 피력한 국민연금의 표결이 무색하게 됐다. 국민연금은 ‘지분가치 희석’과 ‘회사가 분할계획 및 취지를 충실히 알리지 않은 데 따른 조치’로 설명했다.

      LG화학이 이사회에서 배터리 자회사 분할을 결정한 이후부터 주총일까지 국민연금은 약 3000억원 규모에 달하는 주식을 시장에서 순매도 했다. 같은 기간 외국인 투자가들은 1조3000억원이 넘는 자금을 쏟아부으며 LG화학의 주식을 사들였다. 그 결과 지난해 20만원대까지 떨어졌던 LG화학의 주가는 현재 100만원을 넘나들고 있다.

      이사 선임은 국민연금이 반대표를 행사하는 주요 안건이다. 이 또한 마찬가지로 지난해 조용병 신한지주 회장, 손태승 우리지주 회장 등은 국민연금의 반대에도 불구 연임에 성공했다. 신한지주는 재일동포로 구성된 주요주주단, 우리지주는 예금보험공사의 찬성표가 주효했다. 지난해 정기주총에서 국민연금은 조현준 회장·조현상 효성 사장의 선임을 반대했으나 모두 선임됐다.

      대한항공, LG화학, 삼광글라스, GLK, 한국콜마, 쌍용양회, 효성 등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열린 임시주주총회에서 국민연금이 반대표를 행사한 기업들은 최대주주와의 지분율 격차가 상당하다. 즉 외부에 비쳐지는 수탁위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기업 경영활동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은 미미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지난해 국민연금이 투자자들의 이목을 끈 기업의 임시주총에서 찬성표를 던진 기업은 SK텔레콤의 티맵모빌리티 분할, 대림산업의 지주사 전환 등이었다. SK텔레콤의 최대주주와 국민연금의 지분율 차이는 15%p 남짓, 대림산업에선 약 10% 수준이었다.

      올해 주주총회에서도 국민연금은 어김없이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를 선언할 것으로 보인다. 일부기업들에 대해선 공시를 통해 주식의 보유목적을 기존 ‘단순 투자’에서 ‘일반 투자’로 변경하며 주주로서 목소리를 내겠다는 의지를 나타내고는 있지만 주주가치 제고를 위한 실질적인 움직임은 여전히 미흡하다는 평가다. ‘보여주기 식’ 표결을 넘어선 적극적 주주제안 등을 위해선 보다 전문성을 갖춘 수탁위의 구성과 투명한 의사결정 과정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