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OTT는 '돈만 주고 간섭하지 않을' 준비 돼있나
입력 2021.03.04 07:00|수정 2021.03.05 08:07
    '투자자 입김'은 K콘텐츠 업계의 고질병
    국내 OTT는 '목표 구독자 수'에 더 관심
    • 지난달 25일 넷플릭스가 국내에서 진행한 콘텐츠 로드쇼(간담회)에서 ‘올해만 5500억원’이라는 통 큰 투자만큼 눈길을 끈 건 넷플릭스가 콘텐츠를 대하는 방식이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콘텐츠 제작에 참가했던 국내 창작자들은 각각 작품에 대해 “넷플릭스가 아니었으면 만들지 못했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킹덤 집필을 할 때 ‘이렇게까지 간섭을 안해도 되나’ 싶었다. 넷플릭스에서 신뢰를 보여줬고, 집필부터 ‘하나의 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써온 것을 검토한다기보다 창작자에게 뭘 해줄 수 있을까를 고민하더라. 아이디어는 안 주고, 돈만 줬다.” (‘킹덤’의 김은희 작가)

      “인간수업은 민감한 소재여서 제작사 입장에선 작품 자체가 도전이었는데, 넷플릭스에서 ‘해 보자, 할 수 있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확신을 보여줬다. 처음 미팅 때 ‘이 작품으로 뭘 얘기하려고 하냐’고 물었고, 제작팀부터 홍보팀까지 모두가 그 내용을 전달하려고 노력했다.” (‘인간수업’ 제작사 윤신애 대표)

      ‘간섭이 없어서 놀랐다’는 말은 반대로 지금까지 국내에서 콘텐츠를 만들 때는 ‘간섭이 많다’로 해석된다. 그 어떤 업계보다 창의성이 보장돼야 할 콘테츠 업계에서 ‘돈 쏘는 쪽’의 입김이 강력하게 작용한다는 점은 ‘K콘텐츠’의 아킬레스건으로 지적돼왔다. 영화 제작에서도 작품 선별에 투자팀의 영향이 압도적이다. 콘텐츠를 주력 사업으로 두고 있는 기업조차 회사 내 콘텐츠 관련 의사결정 과정이 돈 줄을 쥐고 있는 재무팀에 의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런 상황을 고려했을 때 영화 ‘기생충’의 성공은 운 좋게 국내 시스템이 ‘거꾸로’ 작용한 사례다. 기생충의 투자와 배급을 담당한 CJ ENM에서 기존의 기조를 버리고 오로지 ‘봉준호’라는 창작자를 믿고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완성도 높은 작품이 나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CJ ENM은 경영진의 ‘K컬쳐’에 대한 강력한 의지가 회사의 콘텐츠 제작에도 영향을 미치면서 콘텐츠의 독창성과 다양성이 흐려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 바 있다.

      엔터테인먼트업계에 정통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국내에서 기생충처럼 이렇게 흥행에 성공할 지 안할지 모르는 영화는 자기 돈 가지고는 절대 못 만든다. 투자자들이 감독인 봉준호와 배우 송강호를 믿고 투자를 하고, 감독도 본인이 하고싶은 영화를 할 수 있을 때 도전적이고 새로운 콘텐츠가 나올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 초부터 국내 OTT(온라인 영상 스트리밍 서비스)를 이끄는 각 기업들은 오리지널 콘텐츠 성장을 강조하고 있다. 토종 OTT의 양대산맥인 웨이브(WAVVE)의 SKT와 티빙(TVING)의 CJ ENM은 각각 지난달 컨퍼런스콜에서 올해 목표 중 하나로 OTT 사업 성장에 방점을 찍었다. 시장의 관심이 큰 만큼 OTT 사업 전략에 대한 질문이 쏟아졌지만, ‘목표 구독자’가 있었을 뿐 사실상 구체적인 ‘콘텐츠 전략’은 들을 수 없었다.

      상장사의 실적발표 자리인 만큼 특별히 숫자가 강조된 점은 이해된다. 다만 늘어나는 투자 금액과 콘텐츠 차별화를 얘기하면서 명확한 비전 제시가 되지 않다보니 일부 시장 관계자들은 “이걸 왜 하는지 모르겠다”는 의문도 내놓는다.

      넷플릭스라고 콘텐츠 자체가 종착점은 아니다. 좋은 콘텐츠를 확보하려는 것도 결국 더 많은 구독자를 모아 매출을 올리기 위함이다. 플랫폼 제공자이자 투자자로서, 게다가 광고 없이 오로지 구독료로 수익을 올리는 비즈니스라 ‘제 돈 들인’ 콘텐츠에 거는 위험부담도 크다. 콘텐츠 모두가 무조건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넷플릭스의 방식은 좋은 콘텐츠가 어떻게 탄생하는지, 그리고 그 콘텐츠가 가지는 힘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김민영 한국·아시아 지역 콘텐츠 총괄은 “넷플릭스의 역할은 작가, 제작자의 비전을 현실화하는 것을 돕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굉장히 많은 대화를 한다”며 “창작자들이 만들어낸 콘텐츠를 더 많은 시청자에 알리고,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선순환이 넷플릭스가 지향하는 목표다”라고 강조했다.

      '콘텐츠 후진국'이었던 한국이 지금의 ‘콘텐츠 강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열정적인 창작자들이 도전적으로 다양하고 참신한 콘텐츠를 생산해내면서다. 업계 관계자들은 지금의 국내 OTT 기업들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고 혁신을 흉내내기만 한다면 글로벌 기업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판도를 뒤집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관측한다.

      킹덤의 김은희 작가는 “작품을 진행하면서 한 번도 ‘NO’를 안들어봤고, ‘그 다음은 뭐냐’는 질문만 들었다”고 말했다. 국내 OTT들은 킹덤과 같은 작품을 만들면서 ‘NO’를 하지 않을 준비가 돼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