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기판으로 변질된 공모주 청약...금융당국이 '조력자'였다
입력 2021.03.31 07:00|수정 2021.04.01 07:04
    1인 1청약·중복투자 금지에 통장 130개 동원
    일반청약 물량 늘리며 투기에만 유리한 환경
    간접투자 택한 대다수 보통사람 몫 빼앗은 셈
    청원 나서는 동학개미…대표성·책임능력도 의문
    • "증권회사 객장에 통장 20여 개는 보통이고 심한 경우 130개까지 들고 찾아오는 사람이 있다"

      지난 2월 한 금융권 종사자가 금융감독원에 공모청약 제도 개선안에 대해 쓴 국민제안의 한 대목이다. 보통 사람은 생각할 수도 없는 돈으로 청약에 참여해 세금 한 푼 없이 이득을 챙기고 있다는 투기행위에 대한 고발이다.

      유가증권 인수업무에 관한 규칙에는 1인 1건에 한해 청약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다. 이번 청약 제도 개선을 통해 다수 증권사를 통한 중복청약도 금지됐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온 가족을 동원해 통장 수십 개를 활용하는 편법이 만들어졌다.

      실제로 금감원 측은 위 국민제안에 대해 "대리인을 통한 1인 다수계좌 신설, 청약을 획일적으로 제한하면 적법절차를 따른 선의의 피해자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종합적으로 판단해 결정해야 한다"라고 답변했다. 섣불리 청약 제도를 개선하면서 투기판이 열렸다는 성토에도 이제 와 수습하기는 곤란하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인기가 높은 공모주일 경우 제도 개선의 이상 징후도 더 짙다. SK바이오사이언스 주가는 상장 첫날 따상을 찍고 연일 내리막을 달리고 있다. 상장 초기 공모주 가격 변동성이 크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보기 어렵다. 상장 당일 수익 실현에 나선 개인투자자만 환호할 일이다.

      금융당국이 1년 남짓 공모시장이 과열된 틈을 타 일부 개인투자자에 휘둘린 결과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크다.

      금융당국은 기업공개(IPO) 과정에서 개인들의 적극적인 참여 요구가 증가했다는 이유로 일반청약자 참여기회 확대 방안을 마련했다. 주식시장 내 개인투자자 역할이 중요해졌다는 점을 반영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공모 청약에 참여하는 개인투자자 상당수가 단기 차익을 바랄 뿐이라는 점까지 숙고하진 못한 듯하다. 솔직하게 말하면 공모시장이 과열 분위기를 보인 것은 지난해 SK바이오팜의 단기 차익 사례가 대다수 국민의 조급증을 자극한 것이 발단이었다.

      금융당국은 청약 미달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우리사주조합 물량 5%를 일반청약 물량으로 배정할 수 있도록 했다. 2017년부터 2019년까지 3년간 우리사주조합 평균 배정물량은 유가증권시장 11%, 코스닥시장 5% 수준이다. 미달 물량은 원래 기관투자자 몫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수요예측에 참여하는 기관투자자에게만 유리한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불만이 제기되자 냉큼 개인 몫을 뚝 떼어준 셈이다.

      기관 대신 개인에게 주자는 취지는 언뜻 공평한 처사처럼 보인다. 그러나 수요예측에 참여하는 기관투자자가 결국 연기금·펀드·자산운용사 등이다. 운용하는 돈의 출처는 대다수 국민이다. 기관투자자 몫을 줄이고 일반청약 물량을 늘리는 것을 마치 거대 기업과 보통 사람이 경쟁하는 것처럼 인식하는 것 자체가 이치에 닿지 않는다.

      공모주 투자 열기가 뜨겁다고는 하지만 상당수 국민들은 전문 운용인력을 통해 간접적으로 기업 성장의 과실을 나눠 가지고 있다. 거꾸로 보자면 이번 제도 개선은 일반공모에 직접 참여할 여력이 없는 다수 보통 국민의 몫을 줄여버린 셈이다.

      개인투자자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개선했을 뿐이라 하더라도 문제가 많다. 이전 배정 방식이 기관에만 유리하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이 일반 국민을 대표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이들이 제도 개선으로 인해 발생할 부작용을 책임질 수도 없다. 이미 기관 배정물량이 줄어들며 수요예측 경쟁 심화로 공모가가 치솟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개인 배정물량 상당수가 상장 직후 매물로 나오며 변동성이 극심해지는 것은 덤이다.

      결국 목소리 큰 일부 공모주 투기 세력에 금융당국이 힘을 보태준 모양새가 됐다. 애당초 개인투자자 반발에 못 이겨 섣불리 제도를 손질한 것부터가 무리였다는 지적이다. 공모시장을 오랫동안 경험한 전문가들일수록 현재 청약 열기가 한시적 현상에 그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국민청원 등 여론을 활용해 금융당국을 압박하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주어진다는 학습효과도 관측된다. 국민연금의 국내 주식 비중을 늘려라는 국민청원도 곧 결실을 맺게 될 전망이다. 공매도도 막았고 청약 제도도 손봤으니 공적 연기금도 개인에 유리한 방향으로 운용하라는 이야기다. 극히 일부에 불과한 열성 동학개미가 800조원에 달하는 국민 노후자산까지 좌우하게 될까 우려의 목소리가 많다.

      투자은행(IB) 업계 한 관계자는 "국민청원 때문에 눈치 보인다는 이유로 800조원에 달하는 국민연금의 운용 원칙을 손보는 건 제정신이라고 보기 어렵다"라며 "첨예하게 전문성을 다퉈야 하는 곳에 투표장을 차리고 다수결로 결정하자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라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