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GI가 K-행동주의펀드에 남긴 것들
입력 2021.04.05 07:00|수정 2021.04.05 11:25
    막 내린 한진그룹 경영권 분쟁
    경영권 장악엔 실패…거버넌스 개선은 성과
    한국형 헤지펀드 제도적 기반 마련
    사라질 ‘명분’보다 전문성과 차별성에 집중해야
    • 한국형 행동주의펀드를 표방한 KCGI의 시도는 결국 실패로 끝났다. 엄밀히 말하면 KCGI의 경영권 장악·수익실현은 실패했고, 기업가치를 제고하겠단 목적은 달성했다는 평가가 적합하다.

      앞으로 주주가치를 높이기 위한 또는 그 과정에서 고(高)수익을 얻기 위한 전문 투자자들이 늘어날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제도적 기반이 마련됐고, 시장의 유동성은 풍부하다. 감정과 여론에 호소하기 보단 ‘정교한 전략’과 ‘전문성’을 내세운 투자자들이 활개칠 수 있는 시장이 열리길 기대한다.

      한진칼의 경영권을 노렸던 주주연합, KCGI와 반도그룹 조현아 전 부사장의 연합은 사실상 와해했다. 주식을 공동으로 보유해 동일한 의결권을 행사하겠다는 ‘공동보유계약’이 지난달 말 종료됐다. 각각의 주체들은 언제든 주식을 팔거나 다른 연합체를 구성할 수 있다.

      경영권을 위협하던 주주연합의 연결고리가 느슨해 지면서 한진그룹의 경영권 논란도 일단락 됐다. 올해 주주총회에선 산업은행과 이사회의 안건만이 상정됐고 잡음 없이 통과했다. 한진칼과 대한항공, 한진그룹 전반에 걸쳐 산은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한진그룹은 앞으로 수 년간 또는 기약 없이 산은 관리체제에 놓여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KCGI는 펀드 자금을 투입해 장내에서 주식을 사모았다. 주주들간 연합체를 만들었고, 소액주주들을 끌어모아 표대결을 펼쳤다. 시장경제 논리로는 전혀 흠잡을 데 없다. 그렇기에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수많은 견제에도 불구하고 펀드레이징과 차입, 그리고 투자의 선순환 과정을 만들었다.

      언제든 정부의 개입할 여지가 있는 산업에 도전장을 내민 것은 KCGI의 첫번째 패착이라고 할 수 있다. 한진해운, 대우조선해양 등 정부가 기간산업이라 지칭하는 산업들의 재편 과정을 지켜본 이후였다.

      KCGI는 항공업, 그것도 국내 1위 국적항공사에 출사표를 냈다. 그렇기에 애초부터 KCGI가 확실한 경영권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란 시각은 많지 않았다.

      국토부의 허가가 반드시 필요한 업종의 특성, 각국 정부와 공항 그리고 동맹체인 글로벌 항공사와의 관계에서 협상력을 갖기 위해선 상당한 업력이 필요하다. 과오를 떠나 조중훈 선대회장, 조양호 회장에 이르기까지 항공 업계에서 다져온 입지가 지금의 대한항공을 만드는 기반이 됐다는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조원태 회장이 한진그룹 후대 경영을 맡아야 한다는 당위성과는 다른 문제다.

      외부에서 영입한 몇 명의 전문가들 만으로는 하루아침에 조직과 사업 구조를 획기적으로 변화시키기 어려운 사업적 구조였다. 항공업과 관련한 단 한건의 투자 이력도 없는 사모펀드(PEF) 운용사, 설립된 지 3년도 채 되지 않은 신생 운용사에 국적항공사 최대주주 타이틀을 정부가 묵인할 것으로 보기란 어려웠다.

      때마침 아시아나항공은 공개매각에 실패했다. 코로나 상황이 덮치며 업황은 최악으로 치닫았다. 그러자 정부와 산은이 나섰다. 국유화라는 표현은 쓰지 않았으나 사실상 경영의 모든 권한이 산은 손에 쥐어졌다. 물론 정부의 조치가 후대에 어떻게 평가받을 지는 지켜봐야한다.

      국적항공사에 오랜 기간 몸 담은 한 관계자는 “국내 항공사 가운데 정부와 금융기관, 특히 국토부와 산은 눈치를 보지 않는 곳은 단언컨대 단 한 곳도 없다”고 했다. 그리고 “KCGI가 대한항공을 인수가 목적이었다면, 회사를 오랜 기간 운영할 진정성 있고 자금력을 갖춘 대기업을 앞세우든지, 아니면 정부로부터 어떤 방식으로든 ‘그린라이트’를 받은 상태에서 경쟁에 뛰어들었어야 했다” 평가했다.

      공격의 시작은 ‘명분’ 이었다.

      오너일가의 갑질사건, 일감 몰아주기 등 한진그룹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도는 크게 떨어진 상태였다. 실적과 주가가 만년 제자리걸음 하는 상황에서 KCGI의 제안은 신선했다. “오너일가의 전횡을 끊어낸다”, “투명한 의사결정 체계를 만든다”, “비핵심 자산을 매각해 수익성을 끌어올린다”, “외부 전문가들을 영입한다”는 제안은 소액주주들에게도 반향을 일으켰다. 개인투자자들의 매수세가 집중되며 주가는 큰 폭으로 올랐다.

      이는 장기적으론 독이 됐다. KCGI가 공세를 이어가기 위해선 꾸준히 주식을 사들여야했다. 장기 투자자임을 공표한 이상 주가 상승은 큰 의미가 없었다.

      경영권을 장악하면 주가가 떨어진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도 했다. 한진칼의 기업가치는 변함이 없는데 분쟁만으로 치솟은 주가는 분쟁이 끝나면 제자리를 찾아가는 게 당연하다. 주가가 떨어져도 부담, 올라도 부담, 경영권을 잡아도 부담인 상황이 이어졌다. KCGI는 상당한 차입을 통해 지분을 사들였기 때문에 재무 부담이 갈수록 커졌고, 펀드의 성장 동력은 조금씩 잃어갈 수밖에 없었다.

      투자은행(IB) 한 관계자는 “경영권 분쟁이 지속할수록 KCGI의 딜레마는 점차 커질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됐다”며 “경영권 장악에 한 차례 실패한 이후 내부적으로도 지분을 장내 매각하는 방안을 포함해 엑시트 전략을 마련하려 했으나 마땅치 않았다”고 했다.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명분은 점차 퇴색했다.

      KCGI는 오너일가인 조현아 전 부사장을 영입하며 정체성을 스스로 무너뜨렸다. KCGI와 반도그룹과 조현아 전 부사장의 이해관계는 모두 달랐다. KCGI가 그룹의 경영권을 노리는 동안 반도그룹은 부동산 개발권을 요구했고, 자금력이 열위한 조현아 전 부사장은 그룹 내 타이틀이 절실했다. 각자의 이해관계가 다른 상황에서 손익계산서는 점차 분명해졌다.

      이 과정에서 반드시 주주연합이 경영권을 잡아야만 대한항공이 살아날 수 있다는 당위성은 희미해졌다. 한진그룹 경영진은 KCGI의 제안과 유사한 재무구조 개선 계획을 세웠다. 주주들 입장에선 재무구조가 좋아지고, 주가가 올라간다면 경영권을 누가 잡든 큰 의미가 없는게 사실이다. 냉정하지만 국내 기업의 경영권 분쟁 사례들을 비쳐보면 그러하다.

      기존 경영진과의 차별성이 뚜렷했다면 결과는 달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주연합이 이사진으로 추천한 인물들은 각 주체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할 인사들로 채워졌고, 이미 상당수의 주주제안을 회사측이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KCGI는 사실상 패배했지만, 남긴 것은 분명하다.

      오너일가의 독단적 경영을 방지했고, 자의든타의든 한진그룹의 재무구조 개선 노력을 이끌어냈다. 회사 내부적으로 경영진의 투명성이 강화해야 한다는 경종을 울렸다. 경영진에 대한 최소한의 감시와 견제 장치를 마련하는 성과도 거뒀다.

      사실상의 패배 선언을 통해 강성부 KCGI 대표는 “한진그룹의 기업 거버넌스 개선과 기업가치 향상을 위해 다양한 주주들과 열린 마음으로 대화하고 협력하여 필요시 언제든 경영진에 채찍을 들겠다”고 했다.

      KCGI의 실패를 아쉬워하는 투자자들도 많다. 이는 정부의 직접적인 개입으로 주주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데 따른 아쉬움이기도 하다.

      사모펀드 제도의 개편으로 인해 앞으로 기업 지배구조의 허점을 노린 행동주의펀드들이 늘어날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정부는 경영참여형 사모펀드에 기존 10% 이상의 지분을 의무적으로 보유해야하는 규제를 폐지했다. 국내외 대형 PEF 운용사들은 이에 발맞춰 소규모 투자가 가능한 운용법인 설립에 속도를 내고 있다.

      시장의 유동성은 풍부하다. 기업들은 이제 막 사회적가치(ESG)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여전히 후진적이고 폐쇄적인 지배구조를 탈피하지 못한 기업들도 상당히 많다.

      분명한 것은 투자자들, 소액주주들의 눈높이가 높아졌다는 점이다. 단순히 주가 부양만을 노리면서 기망행위에 가까운 주주제안은 이제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기업가치와 주주가치 제고를 위해 진정성 있게 접근하고, 정교한 전략과 차별화한 전문성을 갖춘 행동주의펀드들이 늘어나 재계에 신선한 바람이 불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