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관 합동 반도체 새판 짜는 美…선택지 줄어든 삼성·SK
입력 2021.04.15 07:00|수정 2021.04.17 15:18
    "현 반도체 지형, 미국 안보 위협"
    東亞 집중된 생산 설비에 '조치'
    美정부·업계 연대한 '왕좌의 게임'
    삼성·SK도 美 이해관계 따라야
    • 미국 정부가 글로벌 반도체 산업의 지리적 편중을 안보 차원 위협으로 정의하며 인텔과 마이크론 등 자국 기업의 후원 역할을 모색하고 있다. 국내 기업에도 미국과 이해관계를 일치시켜야 한다는 부담을 지울 가능성이 높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경쟁자인 미국 반도체 굴기에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밖에 없을 거란 분석이다.

      12일(현지시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CEO 서밋을 열고 삼성전자를 포함한 주요 반도체 기업 간 모임을 주선했다. 2월 초 바이든 대통령이 서명한 행정명령 이후 상무부 산업안전국과 미국 반도체산업협회(SIA)가 반도체 공급망 위기감에 불을 지핀 뒤 이어진 후속 조치로 풀이된다.

    • 미국 반도체산업협회(SIA)는 지난 5일 정부 의중에 대한 의견서를 제출했다. 행정부 우려에 적극 공감한다는 내용이다. 민간이 보기에도 산업 내 핵심자원의 지리적 편중이 경제·안보에 위협으로 작용한다는 이야기다. 정부가 운을 떼고 업계가 화답하는 형태로 동아시아에 쏠린 반도체 생산설비에 조치를 취하겠다는 분위기를 연출하는 셈이다.

      SIA는 정부 인센티브 부족이 이 같은 상황을 만들었다고 지적한다. 공교롭게도 인텔이 파운드리 재진출을 선언하고 마이크론과 웨스턴디지털이 키옥시아 인수를 타진한다는 소식이 전해진 직후다. 민관 합동으로 답을 정해놓고 행동에 나서는 것처럼 보인다.

      적극 개입에 나선 미국의 논리는 단순 명료하다.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아선 안 된다는 이야기다.

      TSMC가 1년 가동중단될 경우 약 420억달러(원화 약 47조원)의 손실이 추정된다. 같은 기간 글로벌 시장에 미칠 타격은 4900억달러(원화 약 547조원)에 달한다. 이를 대체하려면최소 3년 동안 400조원을 투입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민관이 이 같은 시나리오를 돌려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인텔의 파운드리 재진출 선언 배경을 짐작할 수 있다. 인텔은 지난 2016년 파운드리 사업을 진행하다 2018년에 철수했다.

    • 인텔이 경쟁력을 갖출 수 있을지 회의적 반응도 나오지만 미국이 작정하고 지원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미국은 지난 20년간 단 한 푼의 보조금도 지급하지 않았다. 동일 조건으로 팹(반도체 공장)을 10년간 보유할 경우 미국이 중국보다 42% 이상 높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자본효율이 그만큼 떨어진다. 업계에선 미국 정부가 인센티브 제도를 도입할 경우 이 격차를 70% 이상 줄일 수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투자은행(IB) 업계 한 관계자는 "반도체는 자본력과 기술력을 모두 동원하는 왕좌의 게임인데, 기술력이 있는 인텔이나 마이크론에 대해서 정부가 인센티브 방식으로 백업을 맡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이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직접 견제한 데 따른 실익을 찾는 과정이란 분석도 있다.

      미국은 중국 반도체 굴기를 상징하는 기업을 일일이 제압해왔다. 이에 따른 수혜는 자국 기업이 아닌 대만과 한국 기업에 돌아갔다. 투자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중국 현지 업체와 합작법인(JV)을 설립하거나 인수합병(M&A)에 적극 나선 것이 주로 미국 업체였기 때문이다.

      마이크론이 대표적 사례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이어 메모리 분야 3위권 업체지만 미중 무역분쟁이 격화했을 당시 우려가 집중된 배경이다. 중국 노출도가 높으니 관세부과나 거래 제한 등 조치에 더 크게 휘청이는 구조였다.

      마이크론은 2017년 샌디스크 출신 낸드 전문가를 CEO로 들이며 경쟁력 강화에 나섰지만 낸드 시장에서 유의미한 점유율 확대는 이뤄내지 못했다는 평이다. 같은 기간 비교적 미중 갈등에서 자유로웠던 SK하이닉스는 키옥시아 지분투자는 물론 인텔 낸드 사업 인수계약을 체결하며 2위권 도약을 바라보고 있다.

      키옥시아 딜은 미국의 전략적 선택과 무관하다고 보기 어렵다. 키옥시아의 낸드 시장 점유율은 17%로 삼성전자(33%)에 이은 2위다. SK하이닉스(12%)가 인텔 낸드(9%) 인수를 완료하면 한국이 1, 2위로 시장 절반을 차지하게 된다. 미국이 낸드 시장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서라도 키옥시아를 품는 그림을 그릴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다.

      반도체 업계 한 관계자는 "다자구도인 낸드 시장은 1위인 삼성전자를 제외하면 수익을 내지 못하고 있는데 '미국' 업체도 M&A를 통해 경쟁상대를 줄이고 점유율을 높여 경쟁을 지속하기 위해선 키옥시아가 유일한 매물인 셈"이라고 설명했다.

      일각에선 일본 반도체의 상징인 키옥시아를 미국에 넘길까 하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미국 정부와 산업계가 이해관계를 일치시켰으니 중국을 제외한 한국과 대만, 일본 등 우방국도 여기에 따르기를 요구할 거란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기업 M&A 자문 담당 한 변호사는 "키옥시아에 투자한 베인 컨소시엄에 일본 정책 자금과 정관계 인사가 연관돼 있어서 미국이 매각을 강력히 요청할 경우 정부 승인 등에서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미국은 자국 기업은 물론 우방 관계를 들어 생산시설 공백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도 높다. 한국·대만과 직접 경쟁하기보다는 미국 입맛대로 균형 잡힌 공급망을 구축한다는 논리에 가깝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신규 생산설비 투자나 고객사 문제에서 미국을 우선 고려해야 한다는 부담이 늘어날 전망이다.

      국내 반도체 업계도 분주하다. 이정배 삼성전자 사장은 9일 열린 반도체협회 회장단 간담회에 참여해 정부의 전폭적 지원을 요청했다. 이날 SK하이닉스는 키옥시아 투자금을 당장 회수할 생각이 없다고 밝혔다. 기존 투자 목적을 고려하면 미국의 행보로 셈법이 복잡해진 모양새다.

      업계 한 관계자는 "미국이 행정명령을 통해 중국향 물량을 미국 기업에 돌리게 만들거나 인센티브를 줄 테니 자국에 설비투자하라는 요구가 가능해진다"라며 "TSMC가 3년간 1000억달러(원화 약 113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힌 것과 백악관이 삼성전자를 초대하는 것을 별개 문제로 보기 어렵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