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주주관여주의' 불 지핀 KB운용, 관건은 '수익률'
입력 2019.06.17 07:00|수정 2019.06.19 09:04
    공개적 주주 제안 금기시된 국내서 눈에 띄어
    연초 이후 주식형 펀드 수익률 1위...화두로 부상
    그룹 차원 지지가 바탕...성과 따라 업계 확산할 듯
    KB운용 "상식적 차원 주주가치 추구...극단적인 것 아냐"
    • "저희는 2017년 12월부터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했고, 고객 자산에 대한 수탁자로서 신의성실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귀사의 미래에 대한 소통이 필요합니다." (KB자산운용이 2018년 1월 컴투스에 보낸 주주 서한 중 일부)

      스튜어드십 코드에 기반한 한국식 주주관여주의(Shareholder Engagement)가 투자업계의 핵심 화두로 급부상하고 있다. '수탁자 책임 이행 활동'을 전면에 내세운 KB자산운용 밸류운용본부의 펀드가 약세장에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내면서다.

      여전히 '주주 서한' 등을 통한 공개적 주주 제안은 국내 투자업계에서 금기시되고 있다. KB운용이 '수익률'을 통해 '대안 투자 전략'으로써 스튜어드십 코드의 유용성을 입증한다면, 주주관여주의가 다른 금융사로 급격히 퍼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KB운용 밸류운용본부가 지난해 초 내놓은 'KB주주가치포커스펀드'는 연초 이후 지난 10일까지 16.7%의 수익률을 기록했다. 같은 기간 국내 주식형 펀드 중 수익률 1위다. 설정 이후 수익률은 9.28%로 코스피지수가 같은 기간 -15.33% 떨어진 점을 고려하면 벤치마크를 무려 26%나 앞섰다.

      KB주주가치포커스펀드의 투자 전략은 복잡하지 않다. 지속성장이 기대되는 저평가 기업에 투자하되, 내재가치 뿐만 아니라 주주가치 제고정책을 종합적으로 고려한다. 주주 환원 정책이 미흡한 기업엔 스튜어드십 코드에 기반해 수탁자에 대한 책임을 다한다. 지금까지 총 8개 기업에 11통의 주주 서한을 발송했고, 이중 6개 기업이 배당 확대 등을 약속했다.

      KB주주가치포커스펀드의 높은 수익률은 스튜어드십 코드 기반 주주관여주의에 대한 시선을 바꿔놨다. 기업이 최대주주만이 아닌, 주주를 신경쓰게 만든 것만으로도 기업가치를 제고할 수 있음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KB운용이 주주 서한을 보내고 주요 주주들과 소송을 진행한 골프존이 대표적 사례다. 골프존은 지난해 최대주주 골프존뉴딘으로부터 연 매출이 46억원에 불과한 골프아카데미 사업을 총 949억원에 인수키로 했다. KB운용 등은 소송을 통해 이를 무산시켰고, 골프존 주가는 지난해 연 저점 대비 현재 2배 이상 오른 상태다.

      한 중견 자산운용사 운용역은 "기업을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주주 제안을 만들어 서한으로 보내는 건 '엘리엇-삼성물산' 구도에 익숙한 국내 투자업계에서 그간 아무도 하지 못했던 일"이라며 "수익률을 떠나 상위 5대 자산운용사 중 한 곳이 '레퍼런스'(참고할만한 기준)을 만들어줬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KB운용 밸류운용본부가 스튜어드십 코드의 아이콘으로 떠오를 수 있었던 건 그룹 차원의 지지 덕분으로 풀이된다.

      KB금융그룹은 스튜어드십 코드에 대해 국내 금융사 중 가장 긍정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윤종규 KB금융지주 회장은 2017년 회장 연임을 위한 회장후보추천위원회 면접 자리에서 '전 계열사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을 약속했다.

      정부와 코드를 맞추기 위한 '입바른 말'이 아니겠냐는 일각의 비판에도 불구, 윤 회장은 경영 투명성을 강화하고 고객에 대한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소신을 밝혔다. 실제로 스튜어드십 코드가 도입되자 KB운용을 비롯해 은행·증권·보험 등 6개 주력 금융계열사가 곧바로 가입을 신청했다.

      KB자산운용을 이끄는 조재민 대표는 윤종규 회장이 힘을 실어주고 있는 인사다. 2015년 차명계좌거래로 과태료 처분(경징계)을 받은 도덕적 흠결에도 불구, 2017년 전격적으로 다시 KB운용의 대표를 맡겼다. 밸류운용본부를 맡은 최웅필 본부장은 조재민 대표가 2009년 직접 KB운용으로 스카웃해온 인물이다. 이전에는 한국투자밸류운용에서 이채원 대표와 함께 가치투자 전문가로 이름을 알렸다.

      금융권에서는 자칫 기업과 날을 세우는 것으로 보일 수 있는 '스튜어드십 코드 이행'이 KB운용에서 가능한 이유로 이런 의사결정 구조를 꼽는다. 이는 반대로 모회사나 거래처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다른 투자회사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는 분석이다.

      결국 키를 쥔 건 KB운용 밸류운용본부가 만들어 낼 '수익률'이라는 평가다. 주주가치를 중시하는 펀드가 높은 수익을 내면 비교적 기업과의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운 비은행·독립계 운용사들도 이런 흐름에 동참할 명분이 생긴다.

      실제로 KB운용 외 주주관여주의에 가장 가까운 운용사로 독립계인 한국투자밸류운용과 트러스톤자산운용이 꼽히는 이유다. 미래에셋자산운용 역시 KB운용이 주주 서한을 보낸 후 SM엔터테인먼트 주식을 추가 매입해 5% 이상 대량보유자가 되는 등 사태의 추이에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한 사회책임(ESG)투자 전문가는 "운용업계 전반으로 흐름이 확산된다면 신한·하나 등 대형 금융그룹들도 움직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된다"며 "KB운용이 중장기적으로 성과를 내주면 적극적으로 수탁자 책임 활동을 이행하려는 후발주자들이 더 빨리, 많이 나타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KB운용 밸류운용본부는 최근 금융권의 관심에 담담한 표정이다. 자신들의 투자 전략이 기업에 적대적인 '주주행동주의'로 포장이 되고 있지만, 상식적인 수준에서의 기업 주주가치 향상을 추구한다는 게 서서히 인식되면 극단적인 시선이 사그라들 것이라는 입장이다.

      정용현 KB운용 밸류운용본부 팀장은 "시장의 반응을 예상한 것은 아니고 앞으로도 주주로서 보다 나은 기업가치에 대해 생각하며 기존대로 묵묵히 (투자를) 해 나갈 것"이라며 "주주 서한에 대해 답변서가 오지 않더라도 강제로 뭘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지속적으로 서한을 보내고 내용이 공개되면 기업이 응답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