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화학' 원해도 대안 없는 화학사들…구조조정 촉박한데 사 갈 곳은 안 보인다
입력 24.03.27 07:00
경제 성장 주도하던 사업에서 골칫거리로 전락
스페셜티 강화와 친환경 전환 대안 제시하지만
LG엔솔 외 확실한 신사업 제시하는 기업 없어
NCC 등 비핵심 자산 매각은 팔기 쉽지 않아
정부 주도 국내 석화 시장 재편 필요성도 제기
  • LG화학의 탈(脫)화학 움직임, 롯데케미칼의 LC타이탄(롯데케미칼타이탄) 매각설 등 국내 대표 화학사들의 구조조정이 본격화하고 있다. 한 때 '차·화·정(자동차·화학·정유)' 중 하나로 국가 경제성장을 주도했던 화학사업이 이젠 골칫거리로 전락한 셈이다. LG화학과 롯데케미칼에 이어 국내 여타 석유화학 기업들 역시 수익성이 낮은 자산을 정리하고 신사업 전환을 꾀하는 시도를 하고 있지만, 뚜렷한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냉정한 평가가 나온다.

    국내 대다수 석유화학 기업들은 고부가가치 제품(스페셜티) 사업 강화를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중국의 범용 제품 공급 과잉에 맞서기 위해 사업 포트폴리오에서 범용 제품을 낮추고, 스페셜티 제품을 키운다는 계획이다. 롯데케미칼 역시 스페셜티 소재 매출 비중을 2030년까지 60%로 확대하며 석유화학 불황에 대응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다만 스페셜티 사업 확장으로는 석유화학업계 불황을 극복하기 역부족이란 평가다. 국내 석유화학업계 한 관계자는 "석유화학사들이 스페셜티를 대안으로 내놓고 있지만, 스페셜티를 슬로건으로 내놓은 지 벌써 20년이 지났다"며 "스페셜티는 시장 규모가 너무 작고, 다품종 소량생산 방식의 스페셜티 사업은 대량 생산에 특화한 한국 석유화학사들의 공정에 적합하지 않다"고 말했다.

    친환경 등 아예 새로운 사업으로 전환하려는 기업들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LG에너지솔루션을 2차전지 기업으로 성공시킨 LG화학 외에는 수익성을 담보할 수 있는 계획을 제시하는 기업이 없는 상황이다. SK지오센트릭은 2021년 SK종합화학에서 사명을 바꾼 후 '폐플라스틱 리사이클링'이라는 친환경 사업 전환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지만 실질적인 수익을 내기까진 오랜 시일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신용평가사 한 관계자는 "SK지오센트릭의 폐플라스틱 사업은 현재 유의미한 수익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며 "폐플라스틱이라는 원료를 구하는 데도 풀어야 하는 문제가 많고, 폐플라스틱 사업은 워낙 초기 시장이라 '돈이 되는 사업'인지 판단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결국 석유화학 기업들이 생존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비핵심 자산 매각 등을 통해 몸집을 줄이며 재무안정성을 꾀하는 것이란 평가가 나온다. 특히 나프타분해시설(NCC)을 보유하고 있는 석유화학 기업들엔 NCC는 구조조정 1순위로 꼽힌다. NCC는 석유화학 기초 원료인 나프타를 분해해 플라스틱, 합성섬유, 합성고무 등의 원료가 되는 에틸렌, 프로필렌, 부타디엔 등 기초유분을 추출하는 석유화학의 핵심 설비다. 하지만 최근에는 점차 수익성이 악화하며 NCC 공장을 가동할수록 손해인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COTC(Crude Oil to Chemical) 설비 도입이 본격화하면 현재보다 원가 경쟁력이 더 훼손될 수 있단 전망도 나온다.

  • 2020년말 울산 NCC 공장을 48년 만에 가동 중단한 SK지오센트릭은 NCC 사업을 정리하길 희망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한화솔루션과 DL케미칼이 에틸렌 공급을 목적으로 설립한 합작사(JV)인 여천NCC는 2022년부터 적자를 이어가고 있다. 여천NCC의 합작 투자 계약 기간은 2024년말 종료되는데, 1~4업장을 각각 2개씩 가져가는 방안부터, NCC 매각까지 여러 방안이 거론된다.

    기초유분 중심의 포트폴리오를 갖고 있는 효성화학은 특수가스 지분 매각에 나섰다. 효성화학은 2023년말 기준 부채비율 4934.6%로, 강력한 재무구조 개선 대책이 시급한 상황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효성화학의 경우 베트남 법인 투자 건이 손실이 너무 커서 신사업을 투자할 여력도 없고, 투자할 때도 아닌 상황"이라며 "특수가스처럼 그나마 매력적인 매물을 내놔서 급한 불을 꺼야 한다"라고 말했다. 

    금호석유화학은 국내 석유화학 기업들 중 그나마 '버티기'가 가능한 기업이라는 평가다. 금호석유화학은 합성고무 생산에 강점을 가졌는데, 코로나 확산 당시 합성고무 수요가 대폭 증가하며 큰 이익을 손에 쥐었다. 금호석유화학은 착실히 쌓았던 이익잉여금을 바탕으로 신중하게 사업을 영위한다는 계획이다. 2~3년 전만 해도 금호석유화학은 여러 투자 계획을 발표했지만, 석유화학 경기가 꺾이면서 재무안정성에 좀 더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분위기다. 

    스페셜티도, 신사업도 대안이 마땅치 않은 석유화학 기업들은 NCC와 같은 비핵심 자산을 매각할 수밖에 없는데, 자산을 내놔도 팔기 쉽지 않은 진퇴양난에 빠진 상황이다. 매각하는 입장에선 막대한 설비 투자금을 고려해야 하고, 이미 경기가 꺾인 전통 석유화학 산업에 투자하는 쪽은 신중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매각 거래가 추진되더라도 국내 사모펀드뿐 아니라 유럽과 중동 등 외국 투자계 입장에서도 고민이 계속 지속할 것으로 보인다. 

    투자은행(IB) 한 관계자는 "유럽에선 이미 석유화학 시장의 수직통합은 끝났고 이제는 아시아 NCC 통합 차례인데 결국 가격이 문제"라며 "국내 기업은 자산 매각 시 프리미엄을 받고 싶겠지만, 해외 전략적투자자(SI)는 공격적인 사업 통합을 위해 진입가를 낮추려 할 것"이라고 말했다. 

    LG화학이 석유화학 부문 소수지분을 쿠웨이트 국영석유공사(KPC)에 매각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는 것처럼, 석유화학 수직계열화를 원하는 중동이 해외 투자자로 나설 거라는 전망이 제시되기도 한다. 자금도 충분하고, 수직계열화 의지도 있는 중동이 적임자라는 설명이다. 

    석유화학 기업들의 자체적인 구조조정이 아닌, 국가 주도로 국내 석유화학 업계 전체가 재편돼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업계 한 관계자는 "석유화학 기업들이 코로나 특수로 잠시 망각했지만, 이젠 정말 바닥이다"라며 "지금 누군가는 문을 닫고, 여력이 있는 기업은 버텨서 석유화학 사업이 재편돼야 하는 상황이다. 일본은 이미 석유화학 시장이 한차례 정리가 됐다"고 지적했다.

    국가가 육성해 키운 석유화학 산업인 만큼, 정부 차원에서 석유화학업의 연착륙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필요성도 제기된다. 최근 정부 각처에서 석유화학 기업들을 두고 컨설팅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석유화학 담당 한 연구원은 "정부 차원에서 화학 사업을 정리 및 지원하는 편이 맞지만, 석유화학업과 관련된 일자리 문제 등 여러 정치적 상황이 맞물려 있어 답답한 상황이 지속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