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重厚長大 산업' 주춤…판교로 발 돌리는 투자자들
입력 2016.02.25 07:00|수정 2016.02.25 07:00
    카카오, 1조원 들여 로엔 인수
    엔씨소프트, 회사채 발행 데뷔
    IT 간판기업, 금융시장 '노크'
    안정적 성장이 투자 매력

    "지속적인 현금창출능력 등
    시장에 꾸준함 증명해야"
    • ‘한국판 실리콘밸리’ 판교로 투자자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카카오·엔씨소프트·넷마블게임즈 등 간판 IT·게임업체들이 자금확보에 나서면서 금융시장도 분주해진 모습이다.

      판교는 심심찮게 “한국에서 유일하게 개천에서 용 날 수 있는 곳”으로 표현된다. 그만큼 IT·게임산업의 성장잠재력만큼은 시장에서 인정받고 있다. 한국 경제의 ‘중후장대(重厚長大)’ 산업이 주춤거리는 시점에 성공신화를 쓴 기업들이 나타난 산업이기도 하다.

      보수적으로 지켜봤던 투자시장의 분위기가 조금씩 바뀌고 있다. 다만 투자 활기가 산업 전반으로 퍼질지는 예단하기 이르다. 꾸준한 현금흐름과 탄탄한 재무상태가 뒷받침 되지 않으면 투자 열기는 금세 식을 수 있다는 시각이 적지 않다.

      ◇ 카카오·엔씨소프트·넷마블, 투자시장 환대 속 금융시장 ‘노크’

      판교 IT밸리는 한국 IT·게임산업의 태동지인 강남 테헤란밸리에서 소규모로 사업을 시작한 기업들이 줄줄이 이전하면서 형성됐다. 네이버·카카오·엔씨소프트 등이 간판기업들이 안정적으로 성장하며 안착했다. 그 다음 성공신화를 꿈꾸는 스타트업 기업들이 꾸준히 발을 들이면서 IT·게임산업을 상징하는 핵심기지로 부상했다. 이 과정에서 기관, 개인할 것 없이 투자자들의 시선도 끌어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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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간판기업들이 차례로 금융시장의 문을 두드리면서 투자자들의 관심은 더욱 커졌다. 카카오의 로엔엔터테인먼트(이하 로엔) 인수가 신호탄을 쐈다. 회사는 인수자금 1조1200억원(현물출자 제외) 중 9000억원을 인수금융으로 조달한다. 금리조건도 나쁘지 않다. 기업어음(CP)은 만기 3~6개월에 2%, 대출은 3년 만기로 3% 수준에서 논의 중이다.

      엔씨소프트는 공모 회사채 시장에 성공적으로 데뷔했다. 기관투자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수요예측에서 5200억원이 몰렸다. 회사는 계획보다 500억원을 늘린 1500억원의 회사채를 발행했다. 조달한 자금은 게임개발 및 마케팅에 투입한다.

      또 다른 대형 게임사인 넷마블게임즈는 상장 준비에 착수하면서 기업공개(IPO) 시장의 ‘대어(大漁)’로 떠올랐다. 회사는 시가총액 10조원을 염두에 두고 있다. 상장을 통해 유입된 자금은 향후 인수·합병(M&A)을 비롯한 외형확장에 쓰일 전망이다.

      지속적인 성장을 통해 시장지배력을 키우면서 투자처로서의 매력도 인정받은 모습이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과거 이들 기업은 신인도가 낮아 증자와 같은 자본성 조달 또는 잠재적인 전략적 투자자(SI)들을 통해 자금유치를 해왔다"며 "시장 인지도와 재무구조가 탄탄해지면서 회사채시장 등 직접금융시장에도 더 자주 등장하게 됐다"고 말했다.

      성장잠재력을 지닌 후발주자를 찾는 움직임도 보다 활발해졌다. 벤처캐피탈이나 사모펀드(PEF)뿐만 아니라 큰 손인 연기금도 관련 중견·중소기업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있다. 직접적인 투자보다는 주로 해당 기업에 투자하는 펀드에 출자하는 세컨더리(Secondary) 방식으로 접근하는 편이다.

      한 연기금 최고투자책임자(CIO)는 “신경제(New economy) 시대로 넘어오면서 플랫폼과 같은 IT 관련 기업들이 새롭게 성장을 이끌 것이란 기대가 있다”며 “사업역량과 기술력을 갖춘 중견기업을 키우기 위해 투자에 나서고 있으며 성과도 좋았다”고 설명했다.

      조선·해운·건설·철강 등 ‘중후장대’ 산업들이 성장둔화 속에 고전하는 것과는 상반된 모습이다. ‘차입을 통한 자금조달→대규모 투자→규모의 경제 달성→캐시카우(Cash cow) 확보’라는 기존의 성공공식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사례들이 늘고 있다. 재계 30대그룹이라도 차입금이 많고 현금창출 능력이 없으면 투자자들이 외면하는 분위기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유일하게 수익성이 눈에 보이는 산업이 IT·게임이다보니 상대적으로 투자매력이 더 부각되는 측면이 있다”고 밝혔다.

      ◇ 섣불리 기대 품기엔 큰 불확실성…현금창출력·재무안정성 증명 필요

      이같은 분위기가 지속적으로 산업 전반으로 퍼질지는 불확실하다. 여전히 투자시장에선 섣불리 낙관하긴 어렵다는 시각도 많다.

      IT와 게임은 실적 변동성이 큰 대표적인 산업이다. 유행이 빠르게 바뀌고 이와 관련된 기술진보도 급격히 이뤄진다. 주력사업의 수명주기가 짧다. 게임만 해도 5년 이상 수명을 유지하는 경우가 손에 꼽는다. 최근 2~3년간 차례로 상장한 데브시스터즈·파티게임즈·더블유게임즈 모두 높은 공모가격으로 화려하게 데뷔했지만, 당시 히트작 이후 이렇다 할 성과를 못 보여주면서 주가가 대폭 하락했다.

      막상 현실은 기대와 달랐던 사례들이 적지 않다. 그만큼 미래 현금흐름을 예측하기 어렵다는 평가를 받는다. 연구·개발비용과 수익성을 예상하고 합리적인 이론모델에 적용해, 기업가치를 산정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다. 기대감만큼이나 기업가치에 거품이 포함됐을 것이란 우려가 따라다닌다.

      카카오와 엔씨소프트가 새로 신용등급을 부여받을 때 크레딧시장에서 이에 대한 의문이 적지 않았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AA-'라고 하기엔 사업 자체의 변동성이 크다는 것이다. 국내 신용평가사들도 평가를 앞두고 내부에서 많은 논의를 거쳤을 정도로 등급에 대한 고민이 컸던 것으로 알려진다.

      신용평가업계 관계자는 “변동성이 크다는 지적이 많았지만 이를 만회할 정도의 시장지위와 재무안정성을 갖췄다고 봤다”고 설명했다.

      이들 기업이 아직까지 만기가 3년이 넘는 중장기 회사채를 발행하지 않은 것도 이같은 보수적 평가가 반영된 결과라는 시각이 적지 않다. 시가총액 12위인 네이버를 제외하면 장기 차입이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장기투자는 아직 부담스럽다는 기관투자자들도 여럿이다.

      한 기관투자자 투자심사 담당자는 “주력사업의 수명이 3년도 안 되는 경우가 많은데 만기 5년 이상의 회사채에 투자하는 건 어려울 것”이라며 “내부적으로 3년물까지만 투자해도 좋다고 정한 상태”라고 밝혔다.

      ‘꾸준함’을 보여주는 것이 최우선과제로 꼽히고 있다. 고정적인 수익기반을 바탕으로 시장지위를 유지하고, 지속적인 현금창출능력을 보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탄탄한 재무구조까지 갖춘다면 투자유치가 한결 수월할 것이라고 투자업계(IB)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현재 신용등급을 부여받은 네이버·카카오·엔씨소프트 등이 공통적으로 시장에 증명해보인 것들이다.

      국내에서 자리매김에 성공한 대형사들은 해외사업 성과여부가 중요해질 전망이다. 특히 해외기반이 약한 카카오의 성장전략을 예의주시하는 분위기다. 회사는 택시·대리기사·미용실 예약·인터넷은행 등 신규 O2O(온·오프라인 연계) 서비스에 대한 투자에 한창이다. 해외에선 아직 뚜렷한 움직임이 없다.

      투자업계(IB) 관계자는 “결국 해외진출에서 얼마나 성과를 거두느냐에 따라 투자자들의 기대감이 달라질 것”이라며 “카카오가 로엔 인수를 비롯해 최근 자금소요가 많았지만 아직은 국내시장에 중점을 두는 수준인 것 같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