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속한 구조조정·신사업 육성 못하면 일본 장기불황 답습”
입력 2016.06.07 07:00|수정 2016.06.08 10:23
    버블 붕괴 후에도 제조업 위기 인식 못해
    기업·은행 동반부실 터진 후에야 구조조정 돌입
    효과 나기까지 15년 소요…이때부터 성장전략 모색
    • 일본은 경영전략뿐만 아니라 구조조정에서도 벤치마킹 사례로 종종 언급된다. 정부와 기업들이 장기 로드맵을 잘 세워 위기를 잘 극복했다는 인식이 짙다.

      알고 보면 이런 일본조차 ‘잃어버린 20년’ 초반에 우왕좌왕하며 애를 먹었다. 신속한 대응과 신성장동력 육성이 함께 이뤄지지 못했다. 이를 반면교사 삼지 않으면 한국경제도 오랫동안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

      LG경제연구원은 최근 ‘일본기업 구조조정 20년의 교훈’이란 리포트를 통해 “일본은 장기불황 초기에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고 구조조정을 과감하게 추진하지 못했다”며 “이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과 전략적 오류가 반복되는 악순환을 겪었고, 부실기업과 산업이 확대돼 은행의 부실문제도 심각해졌다”고 밝혔다.

      일본의 장기불황은 1980년대 후반 ‘버블 붕괴’ 이후 ▲장기간의 금융경색 ▲총수요 관리정책 실패 ▲저출산·인구고령화 ▲극심한 엔고현상 ▲산업경쟁력 약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발생했다. 하지만 당시 일본 정부와 기업들은 버블 붕괴 자체가 부동산·건설·금융산업의 문제로만 한정했다. 제조업에는 문제가 없다는 인식이 강했다. 국가 경제성장률이 0%대로 떨어진 1992년에도 이같은 시각이 그대로였다.

      기업들은 당시 불황을 통상적인 경기순환으로 보고 상황을 견뎌내는데 중점을 뒀다. 비용절감을 비롯한 재무구조 개선전략과 제품 성능개량에 집중했다. 굵직한 구조조정과 혁신은 없었다. 그 사이 기업들의 과잉채무·과잉설비·과잉인력 문제는 더 심각해졌다고 LG경제연구원은 평가했다.

    • 1990년대 후반부터 기업들의 잠재 부실들이 연쇄적으로 터져 나왔다. 이들을 지원했던 대형 은행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주요 시중은행인 훗카이도 타크쇼크은행이 파산했다. 이때부터 글로벌 스탠더드가 도입, 인수·합병(M&A)을 통한 산업 구조조정이 본격화됐다. 철강·석유화학·조선·반도체 등 주요 산업에서 대기업간 통합이 이뤄졌다. 20개가 넘던 시중은행도 3대 대형은행이 주도하는 체제로 재편됐다.

      정부도 상시 구조조정을 유도하기 위한 시스템 구축에 나섰다. 1999년 산업활력재생특별조치법(산업재생법)을 도입해 ▲민간기업간의 통합 ▲사업통합에 대한 세제·금융지원 ▲독점금지 예외적용 등이 가능하도록 했다. 현재 아베 정부의 산업경쟁력 강화법의 초석으로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정책펀드인 산업재생기구(現 산업혁신기구)를 통해 구조조정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효과가 나타난 것은 2000년대 중반부터다. 기업들의 수익성이 조금씩 개선됐다. 슬슬 중장기적 투자전략을 세우며 경쟁력 강화에 나섰다. 일본 정부가 성장전략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철강업의 변화가 대표적이다. 업계는 대형 고로사 5개사 체제에서 대형사 2곳(신일철주금·JFE)과 중견사 1곳(코베제강소) 체제로 재편됐다. 이들은 에너지 절감과 IT기술 적용을 통해 생산성과 품질을 향상시켰고, 고부가가치 특수철강 제조역량을 강화했다. 탄소섬유, 알루미늄 등 신소재를 사용한 자동차용 철강이 대표적이다. 2012년 -6~3%에 그쳤던 이들의 자기자본이익률(ROE)는 2014년 8~10% 수준까지 상승했다.

    • 석유화학 산업도 비슷하다. 공급과잉 상황에 처한 범용제품 제조사들은 통합했다. 반대로 고부가가치 사업인 특수소재(전자재료·헬스케어·첨단 주조 등)에 역량을 집중했다. 생산설비의 가동효율을 올리며 진입장벽이 높은 새 먹거리도 발굴했다는 평가다. 미쓰비시화학과 도레이가 대표적인 기업이다.

      반도체 산업 구조조정은 실패 사례로 꼽힌다. 1999년 히타치와 NEC의 메모리반도체 부문이 통합해 탄생한 엘피다는 13년 후 미국 마이크론 테크놀로지에 매각됐다. 출범 당시 글로벌 1위가 될 것이란 기대와 정반대로 시장점유율은 3년만에 17%에서 4%로 떨어졌다. 미쓰비시전기의 D램 사업을 인수해 경쟁력을 키우려 했지만, 별다른 진전 없이 반복적으로 위기를 맞았다. 히타치의 연구·개발과 NEC의 양산기술, 미쓰비시 전기의 생산공정 설계기술이 시너지를 내지 못한데다 낸드플래시와 스마트폰 같은 새로운 트렌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이 컸다는 평가다.

      이같은 변화가 나오기까지 15년 이상이 소요됐다. LG경제연구원은 한국 경제가 일본과 유사한 성장경로를 밟아온 걸 고려하면 일본의 시행착오는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보고 있다.

      이지평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일본 기업들은 오랫동안 불황을 겪으며 수익구조 개선을 위해 노력했지만 구조조정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며 “일본이 1990년대말 고전했던 것처럼 주요 산업의 경쟁력이 약해지고 과잉설비 문제가 심각해지면 경제성장세 회복이 어려워질 수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