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 벤처캐피탈로 벤처투자 나서는 대기업
입력 2017.09.08 07:00|수정 2017.09.08 09:12
    오너家 3·4세 주도하는 전업 투자사 속속 등장
    "어차피 적은 돈"…'보여주기式' 투자 지적도
    • 국내 대기업들이 창업투자회사나 신기술금융회사 라이선스 없이 전업 투자사를 차리는 등 벤처투자에 대한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미 사내 벤처투자 조직을 갖춘 곳은 투자처 발굴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일각에선 그간 이뤄졌던 투자를 감안하면 벤처투자 흉내 내기 정도에 지나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벤처투자 업계에 따르면 최근 코오롱그룹 사내 벤처캐피탈(CVC) 이노베이스는 미디어 콘텐츠 스타트업에 투자했다. 회사 설립 후 진행한 세 번째 투자다. 이노베이스는 지난해 이웅렬 코오롱그룹 회장의 장남 이규호 상무보가 이끈 벤처투자 사내 TF팀이 전신이다. 코오롱그룹은 이미 자회사로 창업투자회사 코오롱인베스트먼트를 두고 있지만 초기 벤처기업 투자를 위해 이노베이스를 새롭게 만들었다.

      벤처투자 업계 관계자는 "기존 대기업 내 CVC가 적지 않지만 이렇다 할 투자는 이뤄지지 않았던 게 사실"이라며 "최근엔 새롭게 투자사를 만들거나 기존 CVC도 투자처를 검토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이어 "중견 M제약사가 사내 투자사 설립을 검토하는 등 가장 보수적인 곳으로 꼽히는 제약사들도 이런 움직임에 동참하는 모양새"라고 덧붙였다.

      대기업 오너 3·4세들을 중심으로 전업 투자사 결성 열풍이 불고 있는 이유로 '복잡한 경영에 손대기 싫어하는 자녀들의 성향'이 꼽힌다. 아버지가 했던 복잡한 본업보다 비교적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투자업에 대한 관심이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투자사를 운영하며 간접적으로 경영 수업을 받을 수 있다는 점도 영향을 줬다.

      투자업계 관계자는 "딸은 호텔이나 백화점, 아들은 금융업을 하고 싶어한다"며 "창업투자회사나 신기술금융회사 라이선스를 받으면 운용 과정에서 적용 받는 규제가 많기 때문에 일반 투자사를 세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새 정부가 마침 벤처·스타트업 활성화를 기조로 내세우고 있어 이를 통해 발맞추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도 이유"라고 전했다.

      국내에서 기업주도형 벤처캐피털(CVC·Corporate Venture Capital)는 대기업 자회사 혹은 계열사인 창업투자회사나 신기술금융사를 이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CVC는 전략적 투자자(SI) 관점에서 모그룹의 자체 자금을 스타트업·벤처기업에 투자하는 투자사를 의미한다. 구글벤처스나 시스코인베스트먼트 등과 같이 당장 투자 성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유망한 곳에 지속적으로 투자해 향후 기존 사업과 연계하는 모델이다. 국내서는 롯데액셀러레이터(롯데)·드림플러스(한화)·한미벤처스(한미약품)·이노베이스(코오롱) 등이 대표적이다.

      직접 모그룹이 투자 자금을 대는 투자사가 많아지면 기업들이 직접 유망 스타트업·벤처기업을 인수하는 사례가 나올 것이란 기대도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IPO(기업공개)나 장내 매각 등에 쏠려있던 벤처투자 회수 창구가 넓어져 벤처투자 시장 역시 성장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급격하게 벤처투자 자금이 늘어나며 기업들의 몸값이 올라 투자가 막혔던 것도 자금력이 충분한 기업들의 투자로 해소될 수 있다는 장밋빛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다른 투자업계 관계자는 "대기업들의 벤처투자 참여가 늘면 현재 국내 벤처투자 시장의 문제로 거론되는 점들이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다"며 "다만 대기업들이 얼마나 관심 있게 참여할 지는 미지수"라고 지적했다. 대기업 계열 벤처투자사들 입장에선 투자사에 들어가는 설립 자본금이나 펀드 결성 규모가 비교적 작기 때문에 벤처투자를 '투자'보단 '지원'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는 설명이다.

      지금까지 이뤄진 투자 포트폴리오를 보면 아쉽다는 평가가 많다. 일반 투자사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는 지적이다. 벤처투자 업계에 따르면 국내 대다수 CVC들은 내부 평가 기준을 기준수익률(IRR)로 두고 있다. 투자한 기업에 조언을 하는 등의 사후관리를 찾아보기 힘들고, 이사회 참여 역시 형식적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는 지적이다.

      한 벤처캐피탈 업체 관계자는 "본래 CVC는 당장 돈이 되지 않더라도 나중에 모기업에 붙일 수 있는 유망 기업에 투자한 것을 기준으로 내부 평가를 해야 한다"며 "CVC의 한 건 당 투자금액 규모가 작다보니 돈을 놀리느니 어디라도 투자하자는 생각이 강한 것 같다"고 말했다.

      투자 건수 자체도 많지 않다. 벤처투자 데이터조사 업체 더브이씨에 따르면 삼성벤처투자는 지난해 11건, 57억원을 투자했다. 작년에 집행된 신규 벤처투자금은 2조1503억원이었다. 삼성벤처투자는 국내 CVC 가운데 그나마 가장 잘 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업체다. 한화그룹 차남 김동원 한화생명 상무가 의욕적으로 만든 드림플러스는 지난해 투자 건이 단 한 건도 없었다. 설립 이듬해인 2015년에 투자한 건은 4건, 총 12억원에 그쳤다.

      다른 벤처투자 업계 관계자는 "삼성벤처투자가 최근 투자한 싸이월드만 보더라도 아쉬움이 많다"며 "싸이월드가 가지고 있는 데이터를 AI 등에 접목하겠단 의도로 보여지지만 싸이월드가 보유한 데이터는 너무 오래 전 데이터일 뿐 아니라 대부분 BGM으로 축적한 음악 데이터 뿐"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싸이월드 말고 유망한 국내 벤처기업도 많은데 굳이 싸이월드를 선택한 것은 결국 고동진 삼성전자 사장과 삼성맨 출신 전제완 싸이월드 대표의 오랜 인연이 작용했다는 것으로 밖에 설명이 안 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