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스타트업·벤처의 이유 있는 '삼성 혐오'
입력 2020.03.05 07:00|수정 2020.03.06 17:44
    협상 도중 직원 접촉·지분 '갈라치기' 투자 해프닝
    글로벌 '오픈 이노베이션' 트렌드…평판 쌓지 못한 삼성
    '수직계열화'와 '소·부·장 기업 육성'은 상충
    "한국 B2B 유니콘 육성은 요원한 문제"
    • #1. 2017년 11월. 삼성전자는 대화형 인공지능(AI) 스타트업 ‘플런티’(Fluenty)를 인수했다. 네이버, 다음, KT 등 출신의 개발자들이 2015년 설립한 회사로, 10명 남짓의 임직원이 회사를 키웠다. “날씨가 좋네”라고 메시지를 보내면 “지금 만날까”, “그러게” 등 자연어 처리 기술을 활용 자동 답장을 나열해주는 플랫폼이다. 삼성전자도 국내에서 최초로 단행한 스타트업 인수이자, 자사의 스타트업 인큐베이션 프로그램 출신 회사인 점을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다만 이 인수 과정에서 벤처캐피탈(VC)업계에선 한가지 해프닝이 전해진다.

      당시 사정에 정통한 관계자들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창업자는 회사 기업가치 평가를 두고 팽팽한 협상을 벌였다. 삼성 측에선 협상이 위태로울 시기 인큐베이션 과정에서 네트워킹을 쌓았던 직원들을 2~3개월간 삼성전자 R&D캠퍼스로 초청했고, 이 과정에서 인력 전원을 인수 직후 삼성전자 내 핵심 부서로의 채용할 방침을 내비친 것으로 알려졌다.

      스타트업 업계 관계자는 “창업자 입장에선 ‘배수의 진’을 치고 협상에 나서야 했지만 직원들의 처우 등 향후 진로도 눈에 밟혔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삼성전자는 인수 직후 인력 전원을 빅스비 개발 부서에 합류시켰다고 공개하기도 했다. 삼성전자는 “인수 과정에 대한 정확한 사실 확인은 어렵다”며 “우수 인력 확보 차원에서 진행했던 사항이고, 특별한 문제점은 없었다”고 밝혔다.

      #2. 올해 2월 삼성전자는 세로로 접는 폴더블 폰 형태의 ‘갤럭시Z 플립’을 출시했다. 국내외 호평이 이어진 가운데, 삼성디스플레이는 ‘갤럭시Z 플립’에 적용된 접거나 펼수 있는 유리를 ‘SAMSUNG UTG’라는 브랜드로 상용화하겠다고 밝혔다. 또 이를 위해 2013년부터 '국내 소재 업체'와 협력해왔다고 덧붙였다.

      익명으로 설명된 핵심 소재업체는 삼성이 이례적으로 경영권 지분을 인수한, ‘도우인시스’라는 중소업체다. 당시 삼성(삼성디스플레이 및 삼성벤처투자)은 통상적인 방식처럼 회사 전체를 인수해 인력과 자산을 확보하는 방식이 아닌 일부 VC들의 지분(9%)만 각개 인수해 최대주주(지분 27%)에 오르는 방식으로 거래를 진행했다. 업계에선 '삼성'과 '납품업체'라는 관계를 고려했을 때 동등한 협상이 이뤄졌을지를 두고 논란이 일었다.

      당장 회수 기회 조차 막힌 소액주주들은 소송 가능성까지 내비치며 불만을 표시했다. 이후에야 삼성디스플레이는 연 초 추가로 21% 지분을 더 인수해 총 48.2% 지분을 확보했다. 경영진의 기존 지분과 개인 주주 일부의 지분을 인수했다. 이 과정에서도 전체 주주들에게 매입 의사를 물어 인수한 것이 아니라, 일부 개인 주주에게만 선별적으로 접촉해 지분을 늘린 점이 확인됐다. 투명하지 못한 매집 방식 때문에 시장에선 "목소리 큰 주주·삼성 이해관계자 지분만 삼성이 인수해주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삼성 입장에선 VC와 일부 개인을 활용해 수월하게 회사의 통제력을 확보했다. 회사의 상장(IPO)을 막아 추후 경쟁사로의 기술 공개와 경영권 변동 가능성도 차단했다는 평가다. 주주들은 "삼성 측이 경영권 확보 이후 기술이전을 단행하고, 도우인시스가 아닌 삼성디스플레이 내 베트남 설비를 통해 양산을 직접 단행할 것"이란 주장을 펴고 있다. 삼성디스플레이는 이에 대한 답변을 거부했다.

      삼성은 스타트업 인수 과정에서 기본적인 '협상 매너'도 지키지 못했고, 핵심 기술기업 인수 과정에선 시점과 방법 모두 불투명한 방식을 택했다. 공통적으로 거론되는 문제는 결국 회사의 '평판'이다.

      과거와 달리 기술 트랜드가 숨 가쁘게 변화하는 IT 시장에서 다수의 기업과의 협력, 즉 ‘오픈 이노베이션’은 생존의 문제다. "삼성전자 혼자서는 갈 수 없다, 같이 나누고 함께 성장하는 것이 세계 최고를 향한 길(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여러분들이 세계시장의 데카콘(시장가치 100억달러 이상)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삼성전자가 든든한 조력자가 되겠다(김현석 삼성전자 사장)"라고 경영진도 수차례 강조하고 있다. 정작 실무 단계에선 오해를 살 수 있는 행동들로 평판을 잃었다는 지적이다.

      보다 본질적인 고민은 삼성 특유 '수직 계열화'로 대표되는 생산방식과 국내 기술 기업과의 공존 문제다.

      통상적으로 창업 5~7년 이후 자금조달, 기술 지연 등의 문제로 ‘데스밸리(Death Valley)’를 겪는 초기 기술기업에 삼성과의 협업은 피하기 어려운 선택지다. 한 소재업체 관계자는 "VC 혹은 금융권 투자유치를 진행하더라도 의사결정에 최소 세 달은 소요되지만 삼성과 협업하면 한 달 안에도 급한 불을 끌 수 있다"고 말했다. 하루라도 빠르게 자금이 투입돼 설비 발주와 양산 돌입에 나서야 할 기술기업 입장에선 삼성과 공동으로 기술을 개발하고 협업하는 방식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디스플레이 업계 관계자는 "업계에선 '도우인시스 없이는 UTG 양산은 불가능하다'라고 할 정도로 도우인시스는 인력 수준이 뛰어난 엔지니어 중심 회사지만 투자금 조달에 애를 먹어 과거 몇 차례 빛을 볼 기회를 놓치기도 했다"라며 "10여 년간 특별한 매출 없이 기술 개발에 매진한 회사다 보니 창업자가 자기 지분을 희석하며 투자비 조달에 나서 왔는데, 삼성의 초기 투자 결정이 큰 도움이 된 점도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이런 기조가 산업 전반으로 번질 경우 특정업체에 종속되지 않은, 즉 독립된 소재·부품·장비 업체의 탄생은 요원할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기술 기업의 기업가치가 삼성·LG·SK 등 '원청업체'가 책정한 수준에 그친다면 국내 시장에서 소재 기업 ‘유니콘’ 육성이 가능한지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다.

      본질적으론 국내 재벌 체제와 스타트업 생태계 간 공생에 대한 질문이지만 업계에선 이를 조율할 정부에 대한 기대감은 크지 않다. 담당 부처는 유니콘 개수 확보에 공을 들이고 “일본에 맞서기 위한 소부장 기업을 육성해달라”는 정부 차원의 당부와 이에 대한 대기업 수장의 화답 수준에 논의가 그치고 있다.

      이 사이 글로벌 기업들은 국경을 넘나들며 기술기업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 미국 코그넥스(Cognex)의 국내 인공지능(AI) 업체 수아랩의 인수 사례가 대표적이다. 특정 VC를 찾아가 경영권(지분 51%)을 확보하는 '각개격파'가 아닌 지분 100% 인수를 단행했다. 창업주는 물론 스톤브릿지·소프트뱅크벤처스 등 초기 단계부터 시리즈 투자에 참여한 재무적투자자들도 고르게 수혜를 봤다. 업계에선 "이제 유망 기술 기업 입장에서 유니콘 등극의 첫 번째 조건은 삼성과 깊게 엮이지 않는 것"이란 목소리도 나온다.

      스타트업 업계 관계자는 "해외 유니콘 기업들의 사업영역이 B2B까지 고르게 분포된 것과 달리 국내에선 '배달서비스'와 일부 '플랫폼' 등 대기업이 쉽게 뛰어들 수 없는 B2C 분야의 유니콘만 양산되는 점도 이런 고질적 문제가 반영된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