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시국에 구원자 아닌, 피해자 자처하는 한국의 골드만삭스들
입력 2020.04.13 07:00|수정 2020.04.16 07:45
    • 지금으로부터 3년전, '한국형 골드만삭스' 육성을 향한 초대형 투자은행(IB)이 닻을 올렸다. 금융당국은 자기자본 4조원 이상을 갖춘 미래에셋대우, NH투자증권, 한국투자증권, 삼성증권, KB증권을 초대형 IB로 지정했다. 이들에겐 자기자본투자(PI), 프라임브로커리지서비스, 기업신용공여 등이 허용됐다.

      깐깐한 금융당국이 초대형 IB를 인가해준 것은 기업금융 때문이었다. 몇 번의 위기를 거치면서 국책은행, 시중은행을 중심으로 한 채권단 체제의 한계가 드러났다. 초대형IB들이 기업 대출이나 비상장사 지분 투자, 회사채 인수 등 기업금융 시장에서 더 큰 활약을 해주길 기대했다.

      아마 지금 같은 비상 상황에서 초대형 IB들이 구원자로 등장하길 바랐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형 골드만삭스들의 현실은 피해자를 자처하고 있다.

      최근 주요국 증시가 폭락하면서 증권사들은 주가연계증권(ELS) 관련 긴급 증거금 납부 수요, 이른바 '마진콜'에 내몰렸다. 특히 초대형 IB들의 부담이 크다. 중복분을 포함한 주요 기초자산별 자체헤지 미상환잔액은 총 67조원가량이고 이중 초대형IB 전체 익스포저가 61조9000억원으로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멀티에셋 중복계산 시 삼성증권 16조원, 한국투자증권 13조원, 미래에셋대우 11조원, KB증권 8조원 순이다.

      거기에 증권사가 발행한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 자산유동화기업어음(PF ABCP) 만기도 돌아오면서 자금 사정은 더 다급해졌다.

      가뜩이나 증권사들의 자금조달 구조는 짧다. 보유자산 또한 대부분 단기성 자산이라 평소에는 큰 부담이 없지만 지금 같은 경색 국면에선 차입금 차환, 환매요청 부채 대응, 투자약정 대응에 어려움이 커진다. 증거금 마련이 시급한 초대형 IB들은 전자단기사채, CP 시장에서 자금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됐다. 이는 단기 자금이 시급한 또다른 쪽으로는 돈이 흘러가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채권시장안정펀드가 막 출범했는데 초대형 IB를 위시한 증권사들은 자신들의 기업어음(CP)을 채안펀드가 매입해주길 읍소하고 있다.

      이들을 바라보는 금융업계는 냉소적이다. 코로나 팬데믹은 지난 몇 번의 위기와 달리 실물경제에 직접적인 타격을 줬다. 언제 끝날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 채안펀드 재가동 취지 역시 실물경제에 자금을 투입하기 위함이다. 이마저도 2008년 A급 기업 중심으로 이뤄졌던 채안펀드가 이번엔 AA급으로 기준을 높이면서 사각지대가 드러났고 코로나 피해가 큰 산업 내 비우량 기업들은 아우성이다. 이런 상황에서 초대형 IB들까지 채안펀드에 'SOS'를 보냈다.

      초대형 IB의 단기금융 경색, 코로나가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지만 근본 원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들은 덩치가 커진만큼 존재의 이유를 드러내기 위해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했다. 너나 할 것없이 해외로 나갔고, 대체투자를 늘렸고, 파생상품을 늘렸다. 신용 이벤트를 맞이한 이 순간에도 돈을 벌 궁리를 하고 있다. 돈을 버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리스크 관리는 '쇼 미 더 머니(Show Me The Money)' 구호에 묻혀 심사 수준에 그쳤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동안 국내 기업금융 시장은 양질의 변화가 있었는지 체감하기 어렵다.

      반론도 있다. "발행어음 인가가 제때 이뤄지지 않아 운신 폭이 크지 못했다", "자기자본의 절대적 규모가 크지 않아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 등 제 역할을 하기에 한계가 있다고 말하며 "과거 다른 산업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 역시 수업료를 내는 과정"이라고 항변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골드만삭스처럼 되기 위해선 수업료를 지불해야 한다. 비용이 예상보다 많을 수도 있고, 기간도 길 수 있다. 하지만 지금같은 방식은 아니다. 굳이 '한국형'이라는 단어를 붙인, 초대형 IB 육성 취지를 되새겨봐야 한다. 국내 기업의 자금 지원과 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실패, 그에 따른 자금 지원은 명분이 있다. 이에 빗대면 '마진콜'에는 어느 정도의 명분을 부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현 시점에서 몇몇 초대형 IB들의 신용등급 하락은 불가피해 보인다. 초대형 IB 진입을 노렸던 종합IB들의 입지도 좁아질 수 있다. 증권사들의 자금 조달은 더 어려워질 것이다. 당국을 향한 읍소는 증권사 자금 경색이 불러올 더 큰 위기를 언급하며 호소로 바뀔 수 있다.

      당국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이유는 있겠지만, 초대형 IB들은 이쯤에서 다시 한 번 곱씹어봐야 할 듯 싶다. 그 이름에 어울리는 행동을 했고 그만큼 철저한 대비책을 세워놨는지, 아니 세울 생각을 했는지 말이다. 금융위기를 통해 우리는 글로벌 IB들의 도덕적 해이와 몰락을 다 지켜봤다. 그럼에도 한국형 골드만삭스 육성 카드를 꺼낸 것은 국내 대형 증권사들이 한국 금융시장의 '레인메이커(rainmaker)'가 되길 바란 것이지, 그들을 닮아가라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