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기 더해가는 자산시장…존재감 잃어가는 자본시장
입력 2020.08.20 07:00|수정 2020.08.19 16:26
    초저금리에 자산 가치 급등
    부동산·주식 중심으로 투자↑
    자본시장에는 돈 돌지 않아
    테마 없는 기업은 조달 어려워
    결국 구조조정 부담은 산은에
    • 자산시장이 뜨거워도 너무 뜨겁다. 안전자산, 위험자산 할 것 없이 모두 가격이 오르고 있다. 초저금리 기조에서 코로나로 불거진 경기침체 장기화 가능성으로 자산 가치가 급상승하고 있다. 이제는 서서히 변동성 확대에 따른 버블 붕괴를 걱정할 시점이 됐다.

      돈이 뜨거운 곳으로만 몰리다 보니 이 열기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곳들은 생각보다 많다. 구조조정 과정 속에서 연착륙이 필요한 산업으로는 돈이 흘러가지 못하고 있다. 기업의 투자를 위해 필요한 자금 조달이 이뤄지는 시장, 자본시장이 제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정부의 어깨에 보이지 않는 짐이 더해지고 있다.

      국내 시중 유동자금이 3000조원을 넘어섰다. 그중에서도 1년 미만의 단기 부동자금은 2400조원에 육박한다. 언제든 현금화할 수 있지만 투자처를 찾지 못하고 떠다니는 거대한 유동성이다. 장기투자보다 단기투자, 전형적인 ‘숏머니’ 장세다.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코로나 팬데믹에서 시작한 유동성 랠리는 초저금리를 앞당겼고 돈의 가치를 계속 떨어뜨렸다. 그 돈이 모두 자산시장만 바라보고 있다. 여기선 안전자산, 위험자산이 없다. 시중금리보다 높은 수익률을 기대할 수 있으면 그만이다. 미국 나스닥 지수는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고 코스피는 2400선을 돌파했다.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간 수준이 아니라 시장 판도 자체가 바뀌었다.

      일단 올 한해 한국 시장은 부동산과 주식으로 정리될 가능성이 크다. 기관투자가들의 고민은 숏머니 장세가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지, 지금이라도 이 장세에 타야 할지다. 주로 안전자산인 채권에 투자하는 보험업계나 연기금들도 장기 국채 금리가 1%대 수준으로 내려오자 수익률을 맞추기 위해선 위험자산 투자를 고려해야 하는, 자산 포트폴리오 조정 상황에 처했다.

      리츠, 부동산 펀드 등을 통해 기관투자가들은 부동산 투자에 열을 올렸다. 하지만 이후 정부가 유례없을 정도로 부동산에 대한 강한 규제를 가하면서 변수가 됐다.

      시장에서도 예상들이 엇갈린다. 이제는 투자 가치가 이전보다 떨어졌다고 보는 쪽이 있다. 이지스자산운용이 부동산 펀드를 통해 매입한 삼성월드타워 리모델링 사업을 철회하기로 한 것은 기관들의 부동산 투자 분위기가 얼어붙을 수 있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공모시장에서 2차전지나 바이오 중심의 쏠림현상이 있고, 리츠 자체에 대한 관심도 지난해보다 낮아진 상황이다.

      반면 여러 규제에도 불구하고 가치 상승은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쪽도 있다. 특히 서울 또는 서울과 인접한 수도권 내 상업시설과 교통 편의시설이 밀집된 지역의 부동산은 언제든 현금화할 수 있고 폭락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것이다. 세금 부담을 감안해도 지금 같은 초저금리 시대에서 이만한 수익과 안전을 담보할 수 있는 투자처는 많지 않다.

      주식 시장은 갈 곳 잃은 개미투자자들의 돈이 몰렸고, 이는 주가지수 상승의 원동력이 됐다. 8월 들어 불과 8거래일간 코스피에 몰린 개인투자자 자금만 2조5000억원이 넘는다. 코스닥을 포함하면 3조6000억원에 달한다. 하지만 개미투자자들의 투자 성향에 따라 바이오, 2차전지, IT, 친환경 등 테마주 중심이 됐고 전반적인 상승장 속에서도 온탕과 냉탕이 확연하게 갈린다.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미국에서 코로나 백신 뉴스가 나오면 다음 날 바이오 기업들의 주가가 폭등하고, 테슬라의 행보와 국내 2차전지 기업들의 주가가 연동되는 것처럼 투자자들의 관심이 신산업에 집중돼 있다”며 “주가 상승률이 타 산업 대비 높은데 시기상 거품이 빠질 때도 됐기 때문에 투자 여부 또는 확대를 두고 고민하는 기관들이 많다”고 전했다.

      정부는 시중 자금을 '한국판 뉴딜' 자금으로 활용하기 위해 20조원 규모의 뉴딜펀드 조성 계획을 내놨다. 위험자산에 대한 부담은 정부가 지고 투자자들의 수익률을 만족시켜주겠다는 취지다. 하지만 운용방식을 두고 해결되지 않은 사안들이 많아 당초 계획보다 늦어질 가능성이 커졌다. 또 이 역시 테마주 기업 투자와 다를 게 없다는 지적도 있다.

      부동산, 테마주 광풍의 나비효과는 자본시장의 냉각기를 불러오고 있다. 좀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자본시장의 전반적 역할 축소, 그리고 양극화다.

      10년전으로만 돌아가도 기업들의 외형 확대, 시장 다변화를 위한 투자 활동이 적극적이었다. 때문에 투자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자본시장에서 자금 조달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하지만 코로나 이후 기업들은 보수적 전략으로 선회했다. 자산을 매각해 현금을 확보하고 신사업 투자에 대비하고 있다. 이마저도 여유가 있는 몇몇 대기업들의 얘기다. 주가가 고공행진을 이어가는 와중에 다수 기업들은 생존을 걱정해야 할 판이다.

      기업들은 초저금리 상황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AA급을 넘어 A급 기업들의 회사채 금리도 최저수준까지 떨어졌다. 하지만 투자자 입장에선 금리 메리트는 없고 등급 리스크만 커져 회사채 매입에 선뜻 나서기 쉽지 않다. 찾아보면 그보다 괜찮은 상품들이 더 많다. 회사채 공동화 현상이 BBB급에서 A급으로 확대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올 정도다.

      지난달 HDC현대산업개발(A+)의 회사채 수요예측이 대표적 사례다. 회사채 모집금액 3000억원에서 110억원의 주문을 받으며 흥행에서 참패했다. 아시아나항공 인수, 즉 항공업 진출에 대한 리스크가 반영된 결과였다. 투자자들은 리스크는 크고 수익성은 크지 않은, 어느 하나 매력적인 게 없었다고 설명한다. 회사채 시장에서도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같은 테마를 붙여야 그나마 기관투자가들의 관심을 끌 수 있다.

      실적 발표 기간 동안 소강상태였던 회사채 시장은 중순 이후 재개되지만, 상반기에 비해 발행 여건이 개선됐다고 보긴 어렵다.

      채권자본시장(DCM) 관계자는 “하반기 자금 집행을 위해 기업들의 채권 발행이 다시 줄을 잇겠지만 등급에 따라, 영위하는 산업에 따라, 기업집단 수준에 따라 극명하게 결과가 갈릴 것”이라며 “삼성바이오로직스의 회사채 발행 가능성에 대한 기대감은 있지만 반대로 영세한 제조기업들의 자금 조달은 어려워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주식자본시장(ECM)은 더 철저하게 테마를 따라가고 있다. 바이오, IT, 신기술과 관련된 신규 상장 기업에 대한 기관, 외국인 투자자들의 관심이 커질대로 커졌다. 씨젠, 알테오젠, 신풍제약 등 바이오·헬스케어 기업들은 MSCI(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 한국지수에 입성하기도 했다. 정유사라고 하더라도 2차전지를 갖고 있는 SK이노베이션의 주가가 상승하지만 그렇지 못한 에쓰오일은 부진하다. 전통적 은행주와 유통주는 부진하고 저비용항공사(LCC)들은 유상증자를 통한 자금 조달도 버거운 게 현실이다. PDR(Price to Dream Ratio; 주가꿈비율)처럼 매력적인 키워드를 가지지 못하면 ECM에서 자금 유치는 흥행을 기대하기 어려워졌다.

      자본시장이 제역할을 하지 못하면 그 짐은 고스란히 산업은행을 위시한 정부가 짊어지게 된다.

      산업계는 구조조정이 한창이다. 조선업, 항공업은 정부 주도하에 이뤄지고 있고 정유업계는 자체적으로 신재생에너지 사업 진출을 꾀하고 있다. 자동차도 내연기관에서 친환경으로 옮겨가고 있고 철강업계와 석유화학업계는 고민이 많다. 과거 경제 성장을 이끌었던 산업들이 서서히 지면서 신산업으로 옮겨가기 위한 구조조정 연착륙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점이 됐다.

      이를 위해선 산업 전반으로 돈이 돌아줘야 하는데 시중의 뭉칫돈은 여기에 관심이 없다. 기관들도 여의치 않은 건 같다. 은행들은 대(對)기업 대출을 줄이려고 하고 한때 산업 구조조정의 축이었던 사모투자펀드(PEF)들은 변동성이 큰 장에서 보폭이 줄었다.

      40조원 규모로 기간산업안정기금이 조성됐지만 얼마나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대기업 입장에선 대출금리 자체가 상대적으로 너무 높고 많은 의무가 부여돼 실익이 크지 않다는 평가다. 정작 대기업들의 영향을 받는 다수의 협력업체와 중소기업들의 어려움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수준이다.

      구조조정에서 현 자본시장의 역할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자산관리공사(캠코), 연합자산관리(유암코) 등 전통적으로 구조조정을 담당해 왔던 기관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만큼 정부의 부담이 커진다는 얘기다.

      정부는 전방위적으로 신산업 투자를 강조하며 마중물을 끌어오려고 한다. 기존 산업 구조조정에도 마중물이 요구되는 건 매한가지다. 정부 부담을 줄이고 시중의 유동자금, 자본시장을 활용하려면 대대적인 규제 완화 같은 당근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