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주도의 '뉴딜펀드', 거대 거품만 남길지도
입력 2020.09.24 07:00|수정 2020.09.25 10:03
    배터리·바이오·인터넷·게임 'BBIG'
    뜨거운 성장주에 정부가 기름 부어
    기업들은 '뉴딜 간판' 붙이기에 혈안

    특정 산업 비이성적 쏠림 이미 시작
    정부는 시장 조성, 관리 감독 집중을
    • 지난 7월 문재인 대통령이 한국판 뉴딜펀드를, 이달 초 한국거래소(KRX)가 ‘K-뉴딜지수’를 발표하면서 각종 잡음이 나오는 와중에 홍콩계 증권사 CLSA는 "문 대통령이 펀드매니저로 데뷔했다(Moon’s debut as a fund manager)"는 보고서를 냈다. 뉴딜펀드가 세금으로 손실을 메울 수 있는 정부 조성 펀드라는 점, BBIG(배터리·바이오·인터넷·게임) 성장주가 이미 뜨거운데 정부가 여기에 기름을 부어 수혜를 못 받는 다른 주식들과 관련된 민간펀드는 패자가 될 것이라는 점이 요지였다.

      현재 정부는 풍부한 시장 유동성이 부동산 시장에 쏠리는 것을 막는 한편, 이를 주식 시장으로 유도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부동산 가격은 낮추고 펀드 투자자에겐 투자 이익을 제공하겠다고 보증까지 내놓는 추세다. 이런 '관제펀드'의 목표는 득표'(得票)에 있다.  이로 인해 정부 의도와는 다르게 시장 전반에 거대한 '거품'이 탄생할 조짐마저 보인다.

      사실 관제펀드 도입은 이번 정권만의 일은 아니다. 아울러 모든 관제펀드가 효용성이 없다고 보기도 어렵다. 해외에서도 특정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각국 정부가 주도적으로 펀드를 조성, 활용하는 사례는 많다.

      대표적인 민관합동 펀드 사업으로 꼽히는 ‘요즈마 펀드’는 1993년 첨단 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이스라엘 정부가 조성한 펀드다. 정부가 40%, 민간이 60%를 투자해 IT 기업을 성장시키는 데 한몫했다. 이런 신사업 투자펀드는 벤처캐피탈(VC) 등 금융기관을 지원하는 간접 투자 방식을 꾀한다. 산업에 대한 이해도, 기업 발굴 등 전문성과 수익성 확보 차원에서 민간의 경쟁력이 월등히 뛰어나다는 점을 인정한다. 대신 정부는 신산업의 ‘파이’를 키우기 위해 민간 자본 중심 시장을 조성해주고 관리 감독에 집중한다.

      시장이 나서길 꺼리는 공적인 역할을 위해 펀드를 활용한 경우도 있다. 민간 자본을 활용하지만 수익성 보단 공공성에 방점을 찍고 그 책임을 정부가 진다. 경제 위기나 산업 패러다임 변화 과정에서 실물 경제에 미칠 영향을 최소화하고 구제해야 할 사람과 기업의 안전판 역할을 하기 위함이다.  미국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최대 1조 달러의 부실자산을 매입하는 민관투자프로그램(PPIP)을 출범시켰다. 운영은 민간이, 감독은 정부가 맡아, 한 때 '좀비은행을 양산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부실자산 청산에 일조했다.

      위 사례들은 현재 추진되는 뉴딜펀드와는 방식과 역할에서 큰 차이가 있다.

      이번 뉴딜펀드가 목표로 한 인공지능(AI)과 바이오, 그리고 친환경 산업은 자연스러운 산업 전반의 트렌드다. 여기에 정부와 민간이 힘을 모아 함께 투자한다는 것 자체는 의미 있고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 문제는 해묵은 '케인즈 주의'에 입각해 정부가 기업과 시장을 대신해 스스로 '주인공' 역할을 맡으려는 데 있고, 그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움직임이 포퓰리즘식 정책으로 치환되고 과도한 유동성, 비이성적인 주식시장 활황세와 결합하면서 문제가 된다.

      이미 BBIG-K 지수가 나오면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BBIG에 대한 투자 과열은 상당하다. 뉴딜펀드의 구체적인 수익 창출 방안은 나온 게 없지만 투자 대상이 이미 정해진 터라 유동성 쏠림 현상은 시작됐다.

      기업들은 ‘BBIG’ 간판 붙이기에 여념이 없다. 5G, 수소, 그린, IoT, 바이오 등등 본업과 거리가 먼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선언하고 있다. 뉴딜 연관 산업을 분할해 새로운 회사를 세우기도 한다. 정책적 수혜와 투자 유치를 위해선 못할 게 없어보인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코스피와 코스닥 가릴 게 없다.

      기관의 기업 평가는 유명무실해졌다. 일례로 크레딧 업계에선 여전히 두산중공업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지만 주식시장에선 풍력발전 등 친환경 에너지 기업으로 ‘되살아’ 났다. 태양광 기업들도 마찬가지다. 풍력, 태양광의 실효성 문제는 관심없다. 대표 화학대장주 LG화학의 배터리 사업 물적 분할을 두고 개미들의 청와대 국민청원까지 나온 상황이다. 금융업계에선 배터리 물적 분할이 대규모 자금조달과 장기적 기업가치 제고 차원에서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안이라고 하지만 개미들은 배터리에 투자한거지, 화학에 투자한 게 아니라며 정부가 나서서 막아달라고 하는 실정이다.

      크레딧 업계는 “정부가 특정 산업, 특정 기업을 지명하는 순간 비정상적인 것이 정상이 되고, 뜨거운 주가 앞에서 냉정한 기업 평가는 무의미해진다”고 지적한다.

      외국계 투자은행(IB) 관계자는 “애당초 유동성 물꼬의 방향을 인위적으로 틀었는데 ‘표’를 얻기 위한 정부의 의도가 다분히 담겨 있다”며 “문재인 대통령의 임기는 2년도 남지 않았지만 뉴딜산업 투자는 장기 프로젝트다. 정치적 변수가 발생할 때 혹은 IT버블처럼 특정산업에 대한 우려가 비이성적으로 커지면 붕괴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전했다.

      이어 “뉴딜펀드의 옹호론자들은 ‘투자 사업이 대박나면 모두 수익으로 돌아올텐데 그 때는 뭐라고 할거냐’라고 하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결과론이고 BBIG 간판만 붙이면 된다는 기업들, 투자를 부추기는 주식시장, 그 거품에 올라타기 위한 개미들의 행보는 착시현상을 불러일으킨다”며 “거품이 꺼지면 그 부담은 일차적으론 개미, 이차적으론 금융시장 더 나아가 국가 전체에 미치게 된다”고 지적했다.

      이 과정에서 금융사들은 '전주(錢主)' 역할을 또다시 도맡게 됐다.

      주택대출 규제, 코로나 금융지원 주문, 한국판 뉴딜 참여 독려, 신용대출 축소 당부까지 정부는 금융사들에 끊임없는 주문을 하고 있다. 건전성 부담과 수익성 악화에 대한 목소리가 현장에서 나고 있지만 금융지주사들은 너도나도 수십조원의 뉴딜펀드 투자 계획을 내놓고 있다. 연임을 생각해야 하는 금융지주사 회장, 차기 회장 후보가 될 수 있는 계열사 사장들의 '충성' 경쟁이 시작됐다. 은행 창구에선 벌써부터 뉴딜펀드 불완전판매를 우려하고 있지만 경영진들이 그런 것까지 잴 여유는 없다.

      하나금융투자가 월초에 내놨던 ‘뉴딜 금융, 반복되는 정책 지원으로 주주 피로감은 확대 중’이라는 보고서 해프닝에서 금융지주사들이 처한 상황을 간접적으로 인지할 수 있다. 실상 정부 정책을 비판한 이 보고서는 이후 삭제됐고 그룹은 '외부 압력은 없었다'고 해명했다.

      투자 주체가 돼야 할 금융사들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객체를 자처하고 있다. 금융은 산업이 아니라는 현 정부의 인식이 그대로 드러났다는 비판도 나온다. 그럼에도 금융지주사들은 돈 되는 사업에만 투자하려 할테고 산업은행의 피로감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산은은 정부가 추진하는 사업의 투자 주체이면서 구조조정 역할까지 떠안았다. 국책은행의 자산건전성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정부의 유동성 조정 움직임이 ‘신용’을 기반으로 하는 금융시스템 근간을 흔든다는 지적도 있다. 기업의 펀더멘털보다 미래 가치에 방점을 찍는 투자를 유도하고 있어 불확실성을 부추긴다는 주장이다. 동시에 ‘올드머니’와 ‘뉴 머니’의 충돌 과정이라는 해석도 있다.

      이미 미국에선 뜨거운 논쟁거리다. 월스트리트로 대변되는 ‘올드 머니’는 플랫폼 등 신기술 기업에 대해 보수적이거나 부정적이다. 반면 실리콘밸리의 VC를 일컫는 ‘뉴 머니’는 이들 기업의 속성과 기술력을 상대적으로 더 잘 알고 있다. 테슬라, 니콜라모터스를 둘러싼 논란도 그런 과정 중 하나다.

      한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투자 주체는 기업과 시장이어야 한다는 데는 서로 동의한다. 정부가 나서면 공정성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고 전문성에도 한계가 있다. 장기적으로 VC 시장 확대를 위한 전문 투자사와 운용사 육성에 방점을 찍고 정부는 간접투자 방식을 취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얘기다.

      정부는 매번 신사업 마중물이라는 표현을 쓴다. 실상은 심판이 경기장을 직접 만들고 규칙까지 다 만든 다음 직접 선수로 뛰면서 MVP까지 되려고 한다. 대기업, 신기술 기업, 스타트업, 투자자들이 맘껏 뛸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문제가 발생하면 공정한 심판이 되는 게 정부가 더 잘할 수 있는 일이다. 시장이 만든 거품은 투자자들이 감당해야 하지만, 그 거품을 굳이 정부가 만들 필요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