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 전쟁에 밸류체인 깨지는 반도체 시장…삼성전자 참전 여부 촉각
입력 2020.10.21 07:00|수정 2020.10.22 11:12
    • ‘코로나 팬데믹’으로 축약될 2020년은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도 거대한 분기점이 되고 있다. 인공지능(AI) 반도체 개발 전쟁의 서막을 앞두고 그간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이 구축했던 ‘밸류체인(가치사슬)’이 깨지고 있다.

      종합반도체기업 인텔의 위상과 지배력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경쟁사들의 메가 인수합병(M&A) 건들이 터지고 있고, IT 공룡들은 자체 반도체 개발에 나섰다. '반도체 비전 2030'을 발표한지 3년차에 접어들 삼성전자는 전장(戰場)이 너무 펼쳐져 있어 곤란한 상황이다. 시장의 관심은 하만 인수 이후 잠잠했던 삼성전자가 다시 M&A 시장에 뛰어들지 여부다.

      올해 반도체 시장에서 가장 놀라운 소식은 엔비디아의 ARM 인수였다. 매각 규모는 400억달러(47조5000억원), 반도체 M&A 역사상 최대 규모 딜로 꼽힌다. 업계에서는 ARM을 두고 흔히 반도체 설계를 하는 팹리스(fabless)의 팹리스, 또는 칩리스(Chipless)라고 부른다. 세계 모바일 어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기초 설계의 90% 이상을 차지한다.

      엔비디아는 ARM 인수 전부터 광폭 행보를 달리고 있었다. 3월엔 AI에 기반한 딥러닝 데이터 플랫폼 ‘스위프트스택’을 인수했고, 4월엔 데이터센터용 반도체 칩을 개발하는 멜라녹스를 69억달러에 인수했다. 6월에는 네트워크 운영시스템(OS) 개발업체 큐물러스네트웍스 인수를 공식 발표했다.

      사업 초기 게임이나 그래픽용 보드 메이커로 유명했던 엔비디아는 주력인 그래픽 처리장치(GPU) 외에도 데이터센터와 AI 분야로 사업영역을 확대했다. 엔비디아 CEO 젠슨 황(Jensen Huang)은 AI 시대를 위한 최고의 반도체 회사가 되겠다는 비전을 선언했다. 엔비디아는 과거 인텔이 중앙처리장치(CPU) 시장을 주도했던 것처럼 AI 시대의 인텔 그 이상을 꿈꾸고 있다.

      엔비디아의 ARM 인수가 최종적으로 무산될 가능성도 남아 있다. 미국과 영국, 유럽연합(EU), 중국 등의 독점 규제 당국으로부터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영국과 중국의 분위기가 좋지 않다. 하지만 인수 시도만으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동안 반도체 업체들이 구축했던 밸류체인이 깨질 수 있다는 시그널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엔비디아의 ARM 인수 발표가 나온지 며칠 지나지 않아 AMD의 자일링스 인수 추진 소식도 들려왔다. 예상 금액은 300억달러(약 35조원)이다.

      AMD는 CPU에선 인텔, GPU에선 엔비디아와 경쟁하고 있지만 격차가 큰 2위다. 최근 인텔이 신기술과 공정 개발에 난항을 겪으며 CPU에선 입지를 강화했다. 인수 추진 중인 자일링스는 프로그래머블반도체(FPGA) 선두다. FPGA는 용도에 맞게 반도체 기능을 규정할 수 있는 시스템반도체로 AI용 GPU 경쟁자로 부상했다.  AI를 통한 데이터 처리 가속 플랫폼 분야에서 선전하고 있는 자일링스를 인수해 단숨에 데이터센터용 제품의 경쟁력을 인텔, 엔비디아만큼 높이겠다는 게 AMD CEO 리사 수(Lisa Su)의 복안이다.

      앞서 7월에는 미국 아날로그 반도체 시장 2위인 아날로그디바이스(ADI)와 업계 7위 맥심인터그레이티드가 합병하는 대형 딜이 성사됐다. 기업가치만 680억달러 이상으로 평가받는다. 이번 딜로 ADI는 시장점유율 19%를 차지하는 업계 1위 텍사스인스트루먼트를 바짝 뒤쫓게 됐다. 자동차 및 데이터센터 시장에서 강점을 가진 맥심과 광범위한 산업·통신·디지털 헬스케어 부문의 ADI가 결합하면 자동차 및 5G 칩 제조 시장 점유율이 확대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

      역대급 M&A가 이어지면서 반도체 기업들의 내재화 경쟁이 시작됐는데 반도체 생산과는 무관해 보였던 IT 기업들도 AI 반도체를 자체 생산하려고 한다.

      애플은 연례 개발자 행사에서 PC 제품에도 기존 인텔 칩을 빼고 자체 설계 칩을 넣겠다고 발표했다. 구글은 자체 개발한 클라우드 전용 프로세서(TPU)를 자사 데이터센터에 적용해 엔비디아와 서버 칩 경쟁을 벌이고 있다. 테슬라는 자사 신모델 전기차에 자체 칩(FSD)을 적용했다.

    • AI 반도체 시장 주도권을 잡기 위해 글로벌 팹리스 업체, 이들에게 종속되길 원치 않는 IT기업들은 대규모 투자와 M&A로 몸집 불리기 경쟁에 돌입했다. 메모리 시장 평정 후 2030년까지 시스템반도체 1위에 오르겠다는 목표를 세운 종합반도체기업 삼성전자 입장에선 예상보다 빠른, ‘고객’들의 내재화 움직임이 당황스러울 상황이다.

      삼성전자는 파운드리와 팹리스 양쪽으로 전장을 펼쳐놓은 상태다.

      파운드리에선 인텔의 자체 생산 포기로 낙수효과 기대감이 커졌다. 삼성전자가 엔비디아, IBM, 퀄컴 등 '큰 손'들의 수주를 따내고는 있지만 대만 TSMC는 예상보다 더 견고하다. 삼성전자의 올해 3분기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은 17.4%로 2위다. 50% 이상의 점유율로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는 TSMC와의 격차는 36.5%포인트 벌어져있다.

      TSMC의 최고 무기는 ‘고객과 경쟁하지 않는다’라는 슬로건이다. AI 반도체 개발 경쟁에서 기술 유출 가능성을 줄이고 싶은 고객들은 파운드리 외에 다른 사업을 하지 않는 TSMC를 좀 더 신뢰하는 게 사실이다. 삼성전자는 메모리 시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대규모 투자를 통해 치킨게임을 예고하고 있지만 그만큼 리스크도 크다.

      정부가 한국 기업의 점유율을 10%로 끌어올리겠다는 설계 부문에선 더 막막하다. CPU, GPU, FPGA, ASIC(주문형 반도체) 등 이종 반도체를 섞어서 부족한 성능을 보완하는 헤테로지니어스(heterogeneous) 컴퓨팅이 대세가 됐는데 이걸 자체 투자로 결실을 맺는 건 어렵고 더더군다나 10년이라는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독자적으로 보유하지 못한 기술을 채우기 위해 인텔, 엔비디아, AMD가 반도체 기업들을 집어 삼키는 이유이기도 하다.

      결국 삼성전자도 이 전쟁에 뛰어들어야 할 상황이다. 지난해 삼성전자가 글로벌 차량용 반도체사 NXP 인수를 검토하고 있다는 의견이 나왔다. 앞서 퀄컴이 NXP 인수를 추진하면서 거론된 거래 규모가 50조원이었다. 당시 삼성전자는 부인했지만 최근 다시 NXP의 이름이 떠올랐다. 현재 삼성전자가 보유한 순현금자산만 90조원 수준이다.

      M&A 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는 팹리스와 파운드리 모두 의미있는 성과를 내려고 하고, 엔비디아와 AMD의 움직임은 시장 밸류체인을 깨고 내재화하는 것이기에 삼성전자도 M&A를 할 수 있는 명분을 줬다”며 “남아있는 매물이 많지 않기 때문에 빨리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좋다”고 전했다.

      삼성전자는 표면적으로는 파운드리에 집중하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이달 네덜란드 ASML 경영진을 만나 극자외선(EUV) 노광기 공급 확대를 논의했다. ASML은 첨단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EUV 노광기를 세계에서 유일하게 생산하고 있다. 이 장비는 5나노 기반 반도체 양산에 필수인데 공급량이 제한적이다. 삼성전자와 TSMC는 EUV 노광기 확보에서도 경쟁 중이다.

      이번 출장에서 매물을 확인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네덜란드에는 NXP, 스위스에는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등 기술력이 탁월한 반도체 기업들이 있는데 이재용 부회장은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를 방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업체들 간 인수 경쟁도 있지만 이달말부턴 이 부회장의 경영권 불법승계 의혹 관련 재판, 국정농단 파기환송심이 재개된다. 수십조원 규모의 M&A를 진행하고 결정하는 데 있어 사법 리스크는 여러모로 부담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