産銀 명분 아래 시장은 작동을 멈췄다
입력 2020.11.19 10:01|수정 2020.11.20 14:58
    • "한 편의 잘 짜여진 '설계도'다"

      산업은행과 한진그룹의 아시아나항공 인수에 대한 시장 평가다. 이번 거래는 산업은행이 대한항공 모회사인 한진칼에 8000억원을 투입하면, 한진칼이 이를 활용해 아시아나항공 지분을 인수하고 이후 대한항공이 아시아나항공을 흡수합병하는 구조다. 산업은행이 한진칼의 3대 주주가 되지만 경영 책임은 한진그룹에 넘기고, 사실상 손해를 보지 않는 것이 이번 '설계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KCGI·반도건설·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 등 3자연합은 한진칼 최대주주지만 이 협상에서 완전 배제됐다. 산업은행이 제3자 배정 방식으로 5000억원 규모 한진칼 유상증자에 참여하면 지분율 10.66%의 주요 주주가 된다. 기존 주주인 3자연합의 지분율은 약 42%로, 조 회장 측 우호 지분율은 약 37%로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3자연합은 이사회 진출을 목표로 했지만 경영 참여를 위한 발언권은 더욱 약해지게 된다.

      산업은행은 "기업가치 제고와 경영투명성 확보를 위해 다른 주주와 의견을 나눌 것", 즉 인수 거래가 완료되고 한진칼 대주주가 돼서야 3자연합과 얘기를 나눠보겠다고 밝혔다.

      결론은 정해져 있었다. 정부는 16일 아침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주재로 산업경쟁력 강화 관계장관회의를 열어 아시아나항공 정상화 방안을 논의하고 대한항공이 인수하는 데 합의했다. 그리고 이날 오전 11시에 산업은행은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산업은행과 한진그룹이 양대 국적항공사인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을 하나로 통합하는 국내 항공업 재편의 첫 걸음을 내딛게 됐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 항공업의 국제 경쟁력 확보에 이바지하는 등 국민 경제적 측면의 긍정적 효과가 기대된다."(이동걸 산업은행 회장)

      국민 세금 부담 경감과 '국가 경제'를 앞세운 구구절절한 이유를 들으면 이번 거래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기가 어렵다.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은 "고민과 부담이 있었지만 '수송으로 국가에 기여한다'는 한진그룹의 창업 이념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 시대적 사명이라고 생각했다"는, '수송보국'으로 화답했다.

      민간기업의 경영권 다툼이 한창인 상황에서 국책은행인 산업은행, 더 나아가 정부가 어느 한편에 개입하는 모양새가 됐다. 하지만 산업은행이 내세운 명분 앞에서 최대주주인 3자연합은 목소리를 낼 기회조차 잃었다. 3자연합의 의도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주주자본주의’라는 시장의 논리는 작동을 멈췄다.

      산업은행도 여론을 의식했다. 한진그룹이, 조원태 회장이 "대업을 맡을" 자격이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산업은행은 한진 외에 5대 그룹에 인수의사를 밝혔지만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항공업을 영위해 전문성을 갖춘 한진그룹 외엔 대안이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대신 한진칼과 투자합의서를 체결하면서 한진칼이 지켜야 할 7대 의무조항이 있다고 명시했다. 산업은행이 한진칼의 경영을 견제·감시한다는 것이 요지인데 주요 조항은 ▲산업은행이 지명하는 사외이사 3인과 감사위원회 위원을 선임할 것 ▲주요 경영사항을 사전 협의할 것 ▲윤리경영위원회를 설치할 것 ▲경영평가위원회의 대한항공 경영 평가에 협조할 것 ▲인수 후 통합전략 계획을 수립·이행할 것 ▲투자합의서 위반 시 5000억원의 위약금 등 손해배상할 것 ▲대한항공 주식에 대한 담보 제공과 처분 제한 등이다.

      특히 조원태 회장 일가에 갑질 논란이 발생하면 윤리경영위원회를 통해 경영진을 교체할 수 있다는 내용이 눈길을 끈다. 한진칼 측은 조현민 한진칼 전무, 이명희 정석기업 고문 등 갑질 논란을 일으켰던 가족 구성원은 항공 관련 계열사 경영에 참여하지 않기로 했다.

      어떤 거래를 진행할 땐 여러 내용들이 담긴 합의서를 작성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만 이번 합의서가 어느 정도의 법적 효력을 지녔는지는 모르지만 그 기준 자체가 모호하다.

      오너 일가의 갑질 범위를 어디까지 둘 것인가. (회사 안에서의 갑질에 국한된 것인지, 사적인 영역 모두를 포함하는 것인지. 우스갯소리지만 신체적 접촉이나 물리적 폭력 없이 고성만 지르는 것도 포함되는 것인지 등등)

      그리고 조원태 회장의 경영 실패는 무엇을 기준으로 삼을 것인가. (부채비율 1000% 미만이면 될까. 차입금 규모를 어디까지 줄이면 되나. 대외변수에 따른 실적 부진은 어디까지 반영할 것인가 등등)

      그 기준은 산업은행이 정하고 실행 여부 역시 산업은행에 달렸다. 한진칼 경영권 다툼의 한가운데에 있던 조원태 회장은 산업은행(사실상 정부)이라는 확실하고 든든한 우군을 맞은 것처럼 보였지만, 오히려 조 회장이 추가적인 혈세 투입의 비난에 직면했던 산업은행의 '백기사'가 된 듯하다.

      시장에선 벌써부터 산업은행에 의한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 국유화 논쟁이 불거지고 있다. 진에어, 에어부산, 에어서울을 합치는 정부발(發) '통합 LCC' 출현 가능성과 정치권의 가덕도 신공항 추진론에 제주항공 등 경쟁 LCC들은 무력감을 느끼고 있다.

      국유화 자체가 잘못됐다는 의미가 아니다.

      독일 루프트한자는 이미 국유화했고 에어프랑스-KLM도 프랑스 정부가 국유화를 예고한 상태다. 이탈리아 정부는 국적 항공사인 알리탈리아항공을 국영화하겠다고 밝혔다. 코로나라는 전 세계적인 초비상 사태는 항공업계의 소유와 경영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하지만 우리 정부와 산업은행의 태도는 '메가캐리어'에 대한 경영상 모든 권리는 갖겠지만, 앞으로 발생할 문제에 있어 책임을 지지않겠다(책임이 있다면 조원태 회장에게 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그런 태도는 한진해운 파산, 대우건설 매각, 대우조선해양 매각 사례에서 보듯 항상 그래왔다.

      3자연합, 특히 KCGI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많다. 상황이 이렇게 됐는데 KCGI가 한 것은 보도자료를 뿌리는 것 정도다. 처음부터 누가 봐도 인정할만한 전문경영인을 데리고 와 국민연금 등 기관투자가들을 설득했어야 했다. 우물쭈물하며 확실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는 새 3자연합은 시장의 신뢰를 잃었고 최대주주로서 본인들의 권리도 박탈당하게 생겼다. 이것마저 시장의 논리라면 제대로 작동됐다고 보는 게 맞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장 논리가 작동될지 여부는 결국 재판장에서 가려질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