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조정·투자유치 여념없는 재계…누구의 '파이낸셜스토리'가 가장 뛰어난가
입력 2021.09.16 07:00
    오너 독단적인 사업 확장 및 정리 한계
    투자자 신뢰와 공감 얻어야 하는 분위기
    SK그룹에 대한 평가가 가장 긍정적

    잦은 분할과 재상장, 기업가치 하락 우려
    결국 ‘누구를 위한 스토리인가’ 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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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지금 재계는 ‘이야기’를 만드는 데 한창이다. 과거와 작별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이른바 파이낸셜 스토리(Financial Story)다. SK그룹이 이 단어를 가장 먼저 사용하면서 스토리텔링을 하고 있고 올 들어서 본격적으로 여러 그룹들이 동조하며 각자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 과정은 그 기업만의 세계관, ‘유니버스(Universe)’를 만드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예전처럼 오너가 ‘독단적’으로 사업을 확장하거나 정리하는 게 아니다. 투자자들에게 비전을 제시하고 행위의 당위성을 설명해야 한다. 그래야만 스토리가 탄탄해지고 동참하는 투자자들이 많아진다.

      파이낸셜 스토리의 저작권(?)은 SK그룹이 갖고 있다. 지난해 10월 SK 최고경영자(CEO) 세미나에서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시장의 신뢰와 사회의 공감을 언급하며 ‘파이낸셜 스토리’를 새로운 경영 화두로 제시했다.

      최 회장의 ‘지시’인만큼 계열사들은 발 빠르게 화답했다. 지주회사인 SK㈜를 필두로 SK텔레콤, SK이노베이션, SK하이닉스 등 주력 계열사가 동참했고 지금은 그룹 전체가 이 이야기의 주연 혹은 조연이 됐다. 시장에서의 기대감이 가장 큰 곳도 SK그룹이다. 투자자들과 소통을 원활하게 하려는 노력한다는 측면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다.

      최남곤 유안타증권 연구원은 "SK는 마구잡이로 투자를 하는 것이 아니라 비전을 갖고 ESG 기준에서 어떤 그림을 그리겠다는 것인지, 어떻게 자금조달을 할 것인지 등 전반적인 아웃라인을 잡고 투자자들과 소통하면서 움직이고 있다"며 "투자 대상도 시장에서 요구하는 맥락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다른 지주사들과 격차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양지환 대신증권 연구원도 "길게 보면 SK의 파이낸셜 스토리가 최고"라며 "SK가 미래 사업 쪽으로 상당히 많이 준비하고 있고 신에너지, 반도체 소재, 바이오 이렇게 세 개의 축으로 확장하고 있기 때문에 자회사 포트폴리오를 잘 구축하고 있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SK만큼은 아니지만 다른 그룹들도 바쁜건 매한가지다. 그리고 기대와 우려가 공존한다.

      17일 상장을 앞둔 현대중공업은 기관 수요예측에서 역대 코스피 2위를 기록하며 대박을 터뜨렸다. 정기선 현대중공업 부사장이 핵심 기관을 대상으로 직접 기업설명회(IR)를 진두지휘하는 등 '괜찮은' 스토리텔링을 이어가고 있다. 조선에 집중돼 있는 그룹 사업포트폴리오의 다변화도 꾀하고 있다. 현대제뉴인이라는 중간지주사를 만들어 그 밑에 현대건설기계와 인수한 두산인프라코어를 두고 건설기계 부문을 조선과 버금가는 규모로 육성하겠다는 계획이다.

      시장의 유동성을 빨아당기는 그룹으로는 카카오를 빼놓을 수 없다. 카카오뱅크를 시작으로 각 계열사들의 기업공개(IPO)로 여념이 없다. 오죽하면 시장에서 “카카오는 교통정리도 안하나”라는 볼멘소리가 나올 정도다. 그룹 전체적으로 봤을 땐 시장의 돈이 '카카오'로 쏠리는 건 분명 긍정적 시그널이다. 돈이 들어오면 새로운 사업에 도전할 수 있는 기회도 그만큼 많아진다. 카카오는 구조조정이 아닌, 확장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도 하다. 하지만 계열사들의 상장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카카오의 주주가치가 올라간다고 보기는 어렵다.

      LG의 경우 구광모 회장 시대에 돌입하면서 이전과는 달리 굵직한 의사 결정이 잘 이뤄지고 있다는 평가다. 휴대폰 사업을 정리하고 전장에 '올인'하는 모습은 시장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만 LG화학으로부터 LG에너지솔루션 분할, 이후 상장 추진 과정에서 투자자들의 불만과 리콜 문제가 이어지면서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LX그룹과의 계열 분리 문제 역시 홍보에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GS는 허태수 회장 취임 이후 "뭔가 바뀌고 있다"는 이미지를 준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그동안 대형 매물이 나올 때마다 유력 인수후보로 거론되기만 했었지만 올 들어서는 요기요와 휴젤 인수 4800억원을 들였다. 하지만 여전히 사업 비중이 절대적인 정유사업의 변화가 미미하다는 점, 의사결정의 통로가 단일화돼 있어야 개혁에 힘이 붙는데 상대적으로 그러지 못하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꼽힌다.

      현대자동차그룹은 표면적으로는 정몽구 명예회장에서 정의선 회장으로 바통이 넘어가면서 굉장히 빠른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친환경 모빌리티그룹이라는 전 세계 트렌드에 발맞추면서 수소차에 승부수를 걸었다. 다만 '역량 측면에서 투자자들이 원하는 눈높이까지 올라갔느냐'라는 질문에는 쉽게 답하긴 어렵다. 지배구조 개편 역시 언제든 방향성이 틀어질 여지가 있다. 시장이 주목하는 포인트다.

      롯데는 스토리텔링이 부족한 그룹으로 분류된다. 롯데렌탈 상장이 성공하긴 했지만 이는 본업이 아니다. 바이오 기업 투자 얘기도 계속 나오지만 이 역시 결과물을 기대하긴 어렵다. 결국 본업, 특히 유통에선 경쟁사인 이마트와 비교하며 얼마만큼의 경쟁력 향상을 보여줄 수 있느냐가 관건인데 소비자, 투자자 모두에게 어필을 못하고 있다. 호텔롯데가 상장하고 롯데지주와 합병, 통합 지주로 가야하는데 호텔롯데 상장은 계속 미뤄지고 있다. 대형 M&A를 하기엔 자금 여력도 충분치는 않아 보인다. 다른 그룹들에 비해 움직임 자체가 활발하다고 보기 어렵다.

      투자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다수의 대기업들은 스토리텔링을 계속 이어갈 공산이 크다. 올해말부터 개정공정거래법이 시행되면 기업형 벤처캐피탈(CVC)을 지주사의 100% 자회사 형태로 제한적으로 설립할 수 있다. 이전보다 더 다양한 투자와 M&A 기회가 열리게 된다. 지주회사들은 사실상 투자은행(IB), VC처럼 그룹 사업 포트폴리오 변화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게 된다.

      파이낸셜 스토리에 모두가 웃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SK그룹의 파이낸셜 스토리에 대해 가장 큰 불만은 자회사 투자자들 사이에서 나온다. SK이노베이션 주주들은 배터리 소재 부분의 주주가 되고 싶은데 기업 분할을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고 SK㈜와 합병하는 SK머티리얼즈 주주들은 반도체 소재 부문 주주가 되고 싶은데 지주사 주식으로 교환받아야 한다. 직접 자회사에 투자하고 있는 주주 입장에선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불확실성에 놓여야 한다는 얘기다. 또 SK E&S의 수소사업처럼 신사업의 성공 여부와 구조조정 비용 증가 등 불확실성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

      현대중공업그룹은 조선 이외의 많은 것을 하겠다고 선언했지만 단기간 내에 조정하기는 쉽지 않다. 두산인프라코어 인수 외에 확장 사업은 없다. 로보틱스나 글로벌서비스 역시 모두 선박과 관련성이 높고 '캐시카우' 오일뱅크는 새로움이 없다. 대우조선해양 인수는 아직 미정이다. 산업은행의 산업 구조조정에서 가장 큰 '수혜'를 입었다는 점도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현대중공업 IPO로 모회사인 한국조선해양 투자자들의 불만은 만만치 않다. 지주사 할인으로 주주가치 희석 우려와 중간 지주사로서 배당금을 온전히 가져갈 수 없는 한계도 있다.

      한화그룹은 자회사를 중심으로 활발한 M&A를 진행 중인데 시장은 이를 승계와 엮어서 보고 있다. 모회사와 자회사의 연결고리 변화를 보면서 '누구에게 이익이 될까'라는 질문을 자연스레 하게 된다. 이 과정이 ㈜한화 주가에는 리스크로, 다른 자회사에는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외국계IB 관계자는 "재계의 잦은 기업분할과 재상장은 그룹의 가치 제고, 오너 일가의 트랙레코드를 쌓는다는 측면에선 긍정적이지만 더블 카운팅 이슈가 있어 중장기적으로는 굉장히 부정적일 수 있다”며 “AI, 수소, 바이오 등등 그룹들마다 그리는 그림이 비슷비슷해 차별성이 없는 점도 투자자 입장에선 큰 매력을 못느낀다"고 전한다.

      기업의 파이낸셜 스토리는 누구를 위한 것일까. 승계를 앞두고 있는 오너가(家), 괜찮은 장기 투자처를 원하는 투자자, 아니면 일 하는 임직원들. 그 과정에서 불법 혹은 편법은 없을지, 그리고 누군가 피해를 보진 않을지. ESG가 대세가 된 지금, 내부 직원들의 반발을 마냥 무시할 수는 없다.

      특히나 국내 대다수의 기업집단은 구산업의 비중이 여전히 큰 편이다. 파이낸셜 스토리를 위한 오너의 결정 한 순간에 누군가는 퇴출대상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만큼 구조조정에 따른 물질적, 정신적 비용은 만만치 않다. 진실이 무엇이든 기업은 그에 대한 해답도 스토리텔링에 담아줘야 한다. 진정성이 없는 이야기는 금방 질리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