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뜨거워진 건설사 수주경쟁에 정체성 잃는 '하이엔드 브랜드'
입력 2022.03.18 07:00
    취재노트
    정비사업에서 조합원의 요구에 따를 수밖에 없는 구조
    시공권이냐 브랜드 가치냐 두고 딜레마
    • (그래픽=윤수민 기자) 이미지 크게보기
      (그래픽=윤수민 기자)

      강남권 최고가 단지에만 집중됐던 하이엔드 브랜드 아파트들이 강남을 떠나 전국으로 퍼져 나가고 있다. 이제는 하이엔드 브랜드를 한 단계 더 뛰어넘는 브랜드까지 나올 수 있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의미 퇴색을 넘어 난잡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하이엔드 브랜드는 정비사업에 대한 규제 강화로 서울 등 수도권 주요 도심에서 시공권을 확보할 만한 사업장이 많지 않게 되자 대형건설사들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내놓은 카드였다. 주로 강남이나 한강 주변에 희소성이 있은 아파트가 주요 대상이었다.

      각 건설사들은 내부적인 기준을 두고 하이엔드 브랜드를 운영하고 있다. 단지 규모와 입지, 공사비, 랜드마크 가능성 등이 중요한 요인으로 꼽힌다. 그런데 지금은 이 기준이 애매해졌다.

    • 다시 뜨거워진 건설사 수주경쟁에 정체성 잃는 '하이엔드 브랜드' 이미지 크게보기

      코로나 팬데믹으로 건설사들의 해외사업이 차질을 빚자 주택시장의 수주 경쟁은 더 치열해졌다. 그 결과 하이엔드 브랜드가 남발되고 있다. 요구하는 지역이 많다보니 그럴 수밖에 없다. 지금은 오히려 일반 브랜드 입찰을 찾아보기가 더 어려울 지경이다. 정비 수주전에서 조합원의 입김이 워낙 강력하다.

      일례로 DL이엔씨는 신당8구역에서 조합의 '아크로' 적용 요청을 거부한 이후 시공권을 박탈당했다. 이후 북가좌6구역, 노량진8구역 그리고 안양, 부산 등 지방 사업장에도 적극적으로 '아크로' 브랜드를 적용하고 있다. 롯데건설 역시 흑석9구역에서 조합원들의 르엘 요구에 거절 의사를 밝혔으나, 시공사 자리가 위태롭자 결국 '르엘' 카드를 꺼냈다. 이후 롯데건설은 북가좌6구역에도 르엘을 제시한 바 있다.

      건설사 입장에선 시공권이냐, 브랜드 가치냐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

      건설사들은 각 지역을 대표하는 랜드마크 단지에만 상징적으로 하이엔드 브랜드를 달고 싶어한다. 반면 해당 아파트 입주 예정자들은 일반 브랜드보다 하이엔드 브랜드를 선호한다. 명품 아파트로 인정받는 셈이고, 이를 통해 지역의 랜드마크 단지로 거듭나면 집값도 훨씬 상승할 것이란 믿음이 있어서다.

      여기서 정권 교체는 또다른 변수로 등장한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공약을 보면 ▲5년 동안 250만 세대를 공급 ▲민간재건축 용적률을 300%에서 500%로 상향 ▲30년 이상 아파트 정밀안전진단 면제 등이 있다. 250만 세대 공급(수도권 130만 세대, 서울 40만 세대)에서 민간이 200만 세대를 담당하면서, 브랜드 가치가 높은 대형 건설사 위주로 도시정비시장이 재편될 것으로 보인다. 

      건설사간 브랜드 경쟁은 한층 치열해질 전망이다. 이에 기존 하이엔드 브랜드를 뛰어넘는 '초하이엔드(?)' 브랜드가 나올 수 있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한 건설업계 관계자는 “정비사업은 입찰구조라서 조합원의 요구에 따를 수밖에 없어 건설사의 고급화 전략이 어렵다. 브랜드 가치가 하향 평준화하면 하이엔드 브랜드를 뛰어넘는 브랜드를 만들 게 될 것이고, 우후죽순으로 브랜드가 생겨나서 다시 대폭 줄이는 전개로 흘러갈 가능성이 매우 높다”라고 설명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내심 미소를 짓는 건설사들도 있다. 삼성물산(래미안)과 GS건설(자이)처럼 아예 고급 브랜드를 만들지 않은 건설사들이다. 다른 경쟁사처럼 ‘브랜딩’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

      하이엔드 브랜드가 없다고 실적이 나쁜것도 아니다. GS건설의 경우 올해 1~2월 정비사업부문에서 1조8900억원의 수주액을 기록하며 현대건설(1조6600억원)을 따돌리고 업계 1위를 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