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 유동성으로 빚어진 오만
입력 2022.04.29 07:00
    Invest Colum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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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아직도 시장에 돈이 그렇게 많은걸까. 최근 기업 경영진들의 잇따른 '공격적'인 멘트를 듣고 있으면 그런 의문을 갖게 된다.

      엔데믹을 논하는 시점이 되자 각국 금융당국은 유동성 회수 시그널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투자 유치가 한창이거나 주가 부양을 꾀하려는 기업들에는 여전히 '돈 잔치'의 여흥이 남아있다.

      기업들은 자신감이 넘친다. 시장이 자신들의 기업가치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게 서운하기만 하다. 문제는 시장이 공감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보안 업체 SK쉴더스는 다음 달 상장을 앞두고 있다. 회사가 제시한 시가총액은 공모가 상단 기준 3조5052억원. 비교 기업인 에스원의 시가총액보다 1조원 많다. 지난 26일 있었던 기업공개(IPO) 기자간담회에서 한은석 SK쉴더스 최고전략책임자(CSO)는 에스원과 비교해 기업가치가 다소 고평가됐다는 지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SK쉴더스는 전세계 보안 산업의 미래를 이끌어가고 있다. 재무적 프로파일을 이렇게 멋있게 달성하는 회사는 극히 드물다. 또 사이버 보안과 물리 보안의 역량을 한 회사에 모두 내재화한 희귀한 케이스다. 왜 한 분야의 사업만 영위하는 에스원과 1대1 비교를 하는지 아직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SK쉴더스의 밸류가 에스원보다 높은 데는 사이버 보안 회사의 높은 밸류에이션을 적용했기 때문이다. 각각의 밸류에이션을 일대일로 더해 산술평균을 냈는데 실제 SK쉴더스의 작년 매출 비중을 보면 물리적 보안이 60%에 가깝고, 사이버 보안은 20% 정도다. 이에 한 CSO는 올해 사업 비중을 5대5로 맞추는 게 목표라고 얘기했다. "목표를 세웠으니 이 기업가치 인정해달라"는 주장이 얼마나 객관적으로 들릴지 잘 모르겠다.

      지난 13일 네이버 제 2사옥인 '1784'에서 새로운 리더십이 이끌어갈 방향을 제시하는 '네이버 밋업' 행사에선 김남선 네이버 최고재무책임자(CFO)의 발언이 화제였다.

      "네이버 회사 안에 들어와서 보니까 기업가치가 시장 밖에서는 그만큼 덜 인지하고 있어 많이 놀랐다. 자본시장이 좋았던 작년 여름만 해도 네이버는 시총이 70여조원이었는데 매출 대비 시장가치는 10~11배였다. 5년 내 매출을 2배로 성장시키면 시총이 150조원이 되는 것은 목표라기보다 달성해야 할 현실이다."

      그간 네이버의 '보수적' 성향을 생각하면 김 CFO의 발언은 상당히 과감하고 자신감 넘친다. 글로벌 M&A를 통한 해외 확장이 네이버의 목표다보니 투자 및 파트너 유치를 위해 CFO가 전면에 나서는 모습은 신선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시장의 반응은 살짝 불편하다. 네이버의 주가는 현재 20만원 후반대 정도다. 상장기업의 기업가치는 시장이 회사의 펀더멘털을 보고 결정하는 주가가 결과물이다.

       시장 참여자들은 CFO가 공개적으로 5년내 시총을 3배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를 제시하는 것이 적절한지 되묻는다. CEO라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해외 유수의 IB를 경험한 금융전문가로서 누구보다 시장을 잘 아는 사람이 김 CFO다.

      상장을 추진 중인 마켓컬리도 높은 몸값 때문에 말들이 많다. 4조원을 넘어 6조원 얘기도 나온다. 시장은 이 몸값에 '돈을 벌 수 있나?'라는 의문을 품는다. 김슬아 마켓컬리 대표는 한 인터뷰에서 "지금도 기술, 물류센터 등 인프라 투자를 덜 하면 언제든지 흑자로 전환할 수 있다", "흑자는 능력의 문제 아닌, 언제할지 결정의 문제"라고 말했다. 김 대표의 확신(?)에 찬 멘트는 의구심의 해소보다는, 위기의 반증으로 받아들여진다.

      과거엔 경영진들의 공개적인 기업가치 발언이 많지 않았다. 공개 컨퍼런스콜에서 투자자들이 관련 질문을 해도 밝히기 어렵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논딜로드쇼(NDR) 같은 투자자들과의 프라이빗한 미팅을 통해 소통하거나 투자자들을 이어주는 주관사들과 협의하며 기업가치를 산정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기업가치 제고를 위해 기업들이 직접 '소통'에 나선 것에 대해 업계에서는 이미 돈을 태운 재무적투자자(FI)들 혹은 투자하기로 한 외국계 자금들이 이를 부추긴다고 얘기한다. 유동성 장에서 여러 번 승리의 기쁨을 맛 본 FI들이 좀 더 안전하고 확실하게 엑시트(EXIT)를 하기 위해, 또는 이미 발생한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주가 부양을 요구하다 보니 이전보다 직접적, 공격적 발언들이 나온다는 것이다.

      또 다른 쪽에선 개미투자자들의 위상 강화도 언급한다. '자기들끼리 짜고 치는' 기관투자자 중심에서 벗어나, 개미들이 자신이 투자하는 기업의 가치를 직접 끌어올려달라는 호소라는 것. 가장 잘 활용하는 이는 아시다시피 테슬라 최고경영자(CEO) 일론 머스크다.

      이유야 어찌됐든 경영진이 약속한 바는 지키기 쉽지 않고, 시장은 이를 냉정하게 응징한다. 쿠팡이 대표적 사례다.

      쿠팡이 뉴욕증시에 입성하기 전, 한국 시장에선 쿠팡의 높은 몸값에 물음표를 던졌다. 쿠팡이 한국 유통 시장 변화에 큰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몸값에 걸맞는 펀더멘털인가에 대해선 확신하기 어려웠다. 시장에서 상장 전 쿠팡의 기업가치를 55조원 정도로 추산했는데(이것도 너무 비싸다는 얘기가 많았다) 쿠팡이 뉴욕 증시에 입성하는 순간 기업가치는 100조원을 넘겼다. '이제 세상이 진짜 바뀐걸까'라는 반응이 나올 만 했다.

      1년이 지난 지금, 쿠팡의 주가는 어떤가. 끝없이 우하향을 그리면서, 주당 60달러였던 주가는 13달러대로 떨어졌다. 시가총액은 30조원을 밑돈다. 주가가 급락하면서 투자자들은 최소 50%의 손실을 내고 있다. 쿠팡의 혁신이 기술의 혁신인지, 노동력 투입의 혁신인지 아직 단언할 수 없다. 김범석 쿠팡 창업자가 지난달 컨퍼런스콜에서 "올해 흑자를 달성하겠다"는 공언을 했는데, 유의미하지 않은 흑자는 오히려 한계를 드러낼 수도 있다.

      피터 드러커와 함께 현대 경영의 창시자로 불리는 경영의 대가 톰 피터스는 밸류(Value)에 대해 'Underpromise, Overdeliver'라고 말했다. 덜 약속하고 더 주게 되면 상대는 덜 기대하고 더 만족한다는 얘기다. 밸류는 애초에 수식화하는 게 아닌, 심리적 단어라는 게 적절할지도 모른다. 지금 유동성에 취한 기업들은 더 약속하고 덜 줄지 모르는 'Overpromise, Underdeliver'를 하고 있는 거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