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코케미칼, SK에너지, 현대백화점…저금리 채권 발행은 '앵커 투자사' 덕분?
입력 2022.05.27 07:00
    금리 급등기에 저리로 채권 발행한 기업들 부각
    비싼 값에 수요예측 참여하는 금융사 존재감 눈길
    하단 맡던 연기금 대신 보험사 등 장기투자자 부상
    금융사들, 보험이나 거래 따내려 협조할 가능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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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올해는 시장금리가 급등했고 앞으로도 이런 추세가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며 기업들의 회사채 발행 행보가 조심스러워졌다. 작년만 해도 당연시 됐던 언더(개별민평금리 이하) 발행도 거의 자취를 감췄는데 이 와중에도 일부 기업들은 민평금리나 그보다 낮은 금리로 채권을 찍어 눈길을 모았다. 

      대부분 안정적인 대형사기도 하지만 낮은 금리 조건을 제시해줄 금융사들과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다.

      올해는 전세계적으로 유동성 긴축 바람이 불며 시장 금리가 급등했다. AA- 등급 회사채 3년물 금리는 작년 최저점 대비 두 배 이상 올랐다. 미국은 물론 우리나라 중앙은행도 기준금리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어 금리 상승세가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투자자들은 먼저 나서 움직일 이유가 없었고, 기업들은 미래 금리 상승분까지 얹고서야 채권을 발행할 수 있었다. 많은 기업이 이미 오른 민평금리보다 20bp(0.2%포인트)는 올려줘야 했고, 일부는 40bp 가까운 금리를 붙이기도 했다.

      분위기가 이러니 어쩌다 낮은 금리로 채권을 발행하는 기업들은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민평금리 수준(Par rate)으로 발행하거나 그보다도 낮춘 사례가 드물게 있었다. 현대트랜시스, S-Oil, LG디스플레이, 포스코케미칼, 현대백화점, SK에너지 등이 저금리로 자금을 조달했다. 모두 회사채 발행 규모도 늘렸다.

      이들은 대부분 신용등급 AA급에 안정적인 실적을 내는 곳들이다. LG디스플레이는 A+급이었지만 신용등급 상승 기대감이 커지던 시점에 회사채를 발했했다. 투자자가 사기업 채권을 담는다면 이런 우량기업을 보지 않을 수 없다.

      낮은 발행 금리를 제시해주는 금융사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시선도 있다. 채권 금리는 유효 수요를 살펴 결정하는데, 일부 투자자가 앞장 서서 낮은 금리를 써내면 다른 투자자들도 영향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채권 투자 업계에선 이렇게 처음부터 낮은 금리로 제안을 내는 곳을 '앵커 투자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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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앵커 투자사 역할은 전통적으로 국민연금을 비롯한 연기금이 맡아 왔다. 연기금은 운용해야 할 자금이 많기 때문에 채권 발행 물량이 나오면 일단 담아야 한다는 압박이 크다. 희망 금리를 하단으로 낮춰 채권 물량을 확보하는 전략을 주로 썼다.

      다만 올해는 국민연금도 채권 투자에 소극적이었다. 시장 금리가 계속 오르면 낮은 금리에 비싸게 사둔 채권에서 평가손이 날 수밖에 없다. 국민연금은 단기간의 변동성에 일희일비하지 않지만 올해는 워낙 변동성이 심했던 터라 채권 투자보다 현금을 보유하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야 SK에너지, GS리테일 등 회사채 발행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상황이다.

      국민연금 등 연기금이 주춤한 사이 앵커로 부상한 곳으로는 보험사, 혹은 대형 운용사 LDI(Liability-Driven Investment)운용부서 등이 꼽힌다. 일반 채권투자사들은 가격만 따지니 앵커 역할을 하기 어렵지만 이들은 조금 다르다. 보험사의 경우 장기 자산-부채의 듀레이션을 맞춰야 하기 때문에 단기 수익성보다 만기별 물량을 적절히 받아오는 것이 더 중요하다. 보험사 자산을 운용하는 LDI운용부서도 마찬가지다.

      올해 저금리 채권 발행에 성공한 기업의 경우 가장 저금리 구간 수요는 ‘연기금·운용사(고유)·은행·보험’사가 채운 것으로 나타났다. 현대백화점의 경우 개별민평 대비 -20~+25bp 금리로 3200억원의 수요가 들어왔는데 -20bp에만 600억원이 몰렸다. S-Oil 7년물에는 4곳의 수요가 있었는데 개별민평 대비 -20bp 한 곳, -10bp 두 곳, -1bp 한 곳이었다.

      LG디스플레이의 경우 3년물 수요예측에서 KB손해보험이 최하단 금리(-20bp)를 제시했고, 푸르덴셜생명보험(-20bp), KB국민은행(-19bp) 등이 뒤를 따랐다. 5년물에선 농협생명이 -30bp, KB손해보험이 -20bp를 제시했다. 그 다음은 DGB생명보험이 제시한 -6bp로 격차가 컸다.

      포스코케미칼 3년물은 DB손해보험(-25bp), 현대해상과 메리츠화재(-24bp)가 가장 낮은 금리를 제시했었다. 5년물은 KB자산운용(-19bp), 삼성자산운용(-10bp, -5bp) 순이었다. 모두 LDI 관련 부서에서 수요예측에 참여했다.

      금융사의 경우 대기업과의 관계 때문에 회사채 수요예측에 참여하는 면도 있다는 지적이다. 직원수가 많은 기업들은 이런저런 보험이나 자금 수요, 연금 운용 수요도 많다. 보험사나 은행 입장에선 회사채를 좋은 조건에 발행하고 싶어하는 고객에 성의를 보일 필요성도 있다는 평가다. 최근 울산공장 화재사고가 난 S-Oil은 삼성화재·DB손해보험·현대해상·KB손해보험 등에 재산종합보험을 가입한 바 있다. 각지에 부동산 자산을 가지고 있는 현대백화점은 부동산 관련 금융 거래가 많다는 평가다.

      한 채권투자사 관계자는 “올해 국민연금이 채권 투자에 보수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보험사나 운용사 LDI운용부서 등 장기 자산 수요가 있는 곳들이 앵커로 나서는 경우가 많아졌다”며 “요즘처럼 분위기가 좋지 않을 때는 발행사가 사업 관계가 있는 금융사들에 수요예측에 참여해달라고 요청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