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IRA 발효 코앞…실익 불투명한데 따라가야 하는 韓 배터리
입력 2022.08.18 07:00
    바이든 대통령 휴가 복귀 후 IRA 법안 서명
    'BBB법' 축소판…中 배제·美 현지 투자 기업에 혜택
    보조금 받자면 광물 80%·부품 100% "美 우방국서"
    탈(脫)중국 공급망 재편 과정 '마찰비용' 가늠 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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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 미국 상·하원을 통과한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에 조 바이든 대통령이 서명했다. 미국 현지에 생산설비를 보유한 국내 친환경 에너지 기업의 수혜 기대감이 나오지만 배터리 업체 입장에선 실익이 불투명하단 목소리가 높다. 반도체 산업과 마찬가지로 중국을 제외한 공급망 재편에 울며 겨자 먹기로 동참해야 한다는 평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16일(현지시간) 친환경 에너지 공급망 강화에 약 480조원을 투자하는 내용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에 최종 서명했다. 내달 백악관에서 관련 행사를 열 예정이다. IRA 법안은 지난해 초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 일성으로 추진한 '더 나은 재건(BBB) 법안의 축소판으로 통한다. 지출 계획은 약 7400억달러(원화 약 970조원) 규모로 BBB 법안보다 대폭 후퇴했는데, 기후변화 대응 예산은 3분의 1 정도만 줄어들었다. 

      IRA 법안은 미국 정부가 10년간 대기업 등으로부터 세수를 확보해 에너지 안보·기후 변화와 의료보험 확대를 지원해 인플레이션 부담을 줄이겠다는 게 주요 골자다. 국내 시장에서의 함의는 ▲미국 현지 친환경 산업에 대한 투자 혜택과 ▲중국을 제외한 공급망 재편 동참 요구 정도로 풀이된다. 

      일부 국내 기업에 호재라는 반응이 나오지만 배터리 업체 입장에선 속내가 복잡하다. 

      한화솔루션의 미국 현지 태양광 사업의 경우 내년 말 종료 예정이던 ITC(투자세액공제)가 2024년말께로 연장·확대되며 수혜가 확실시되고 있다. 미국 완성차 업체와 가장 강력한 파트너십을 구축한 LG에너지솔루션·삼성SDI·SK온 역시 현지 생산 차종에 대한 보조금 지급의 수혜를 누릴 수 있다. 중국 CATL 등 경쟁사의 현지 사업에 제약이 불가피한 만큼 점유율 측면에서도 도움이 될 거란 분석이다. 

      문제는 IRA 법안이 전기차·배터리 버전의 '칩4' 동맹 성격이 강하다는 점이다. 

      IRA는 미국 또는 미국과 FTA(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한 국가에서 만들어진 배터리·전기차에 최대 7500달러(원화 약 980만원)의 보조금을 제공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용되는 광물의 40%, 부품의 50%를 내년 말까지 미국의 우방국에서 채워야 하고 이후 매년 10%씩 제한을 늘여 최종적으로 각각 80%, 100% 비중을 맞춰야 한다. 우려 국가(Foreign Entity of Concern)에서 추출·제조·재활용한 광물, 또는 부품 비중이 높을 경우 보조금 지급 대상에서 제외된다. 

      시장은 우려 국가가 사실상 중국과 러시아 등을 겨냥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대상을 특정하지 않았지만 경우에 따라 특정 국가나 기업이 명시될 가능성도 있다. 지난달 LG화학을 방문한 재닛 옐런 미국 재무장관이 "미국은 한국과 같은 동맹국의 협업으로 중국, 러시아를 견제하고 공급망을 관리해 기존 질서를 유지하려 노력 중"이라고 밝힌 것을 감안하면 미국이 원하는 전기차·배터리 생태계 조성을 위한 법안을 내놓은 셈이다. 

      배터리 업계 한 관계자는 "국내 업체 중에선 LG엔솔이 가장 적극적으로 미국이 요구하는 공급망 재편에 대응하고 있는 상황으로 보인다"라며 "금리나 원자재 가격, 기존 공급망을 고려하면 당장 미국 투자를 결정하면 ROIC(투하자본이익률)가 깎일 수밖에 없지만 미국 시장에 선택과 집중을 하려는 것"이라고 전했다. 

      배터리 광물의 80%, 부품의 100%를 미국의 우방국에서 수급하는 것이 실현 가능한 목표인지에 대해서도 우려가 상당하다. 미국 지질학회에서 발표한 '주요광물자원보고서'에 따르면 망간, 코발트, 니켈, 리튬 같은 광물의 경우 전체 정제 물량의 중국 시장점유율이 각각 93%·73%·68%·59%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천연 흑연은 중국이 전 세계 생산량의 82%를 책임지고 정제물량의 100%를 공급하고 있다. 

      국내 소재 업체들이 배터리 3사와 함께 미국에 동반 진출하며 중국 의존도를 낮출 경우 일부 광물·부품은 보조금 기준을 충족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경제성 측면에서 자연스럽게 분업이 이뤄진 공급망을 인위적으로 재편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마찰 비용에 대해선 낙관하기 어렵다는 분위기가 전해진다. 

      증권사 한 관계자는 "전기차 시장 침투율이 10%를 넘기기 전에도 공급망 전반에서 광물·원자재 가격 변동성이 극심했는데, 여기에 보조금이나 관세 형태의 규제 장벽까지 추가되면 업체마다 투자 계획을 다시 손봐야 할 것"이라며 "보조금 7500달러 받자고 그보다 더 큰 비용을 지불해야 할 수도 있는 데다 몇몇 광물은 탈(脫)중국이 어려워 보인다"라고 설명했다. 

      미국의 인플레이션 해법이 역설적이게도 시장 범위를 축소한 채 중복투자와 공급과잉을 유도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이미 배터리 업계 내에서도 시장 규모가 매년 50% 이상 성장하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배터리 산업의 수익성 기대감이 그리 높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미국이 갈수록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요구를 하고 있어 따르지 않을 수 없다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배터리업체 조달 담당 한 관계자는 "각 업체에서도 수익성을 확보하기 위한 대안으로 스마트 팩토리·장기공급 계약 등 고정비 절감을 위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긴 하지만, 계속해서 미국의 요구에 불려 다니는 모양새가 되는 중"이라며 "당장 보조금을 놓치기 어려운 국내 기업들이 전방위 증설에 나서 중복 투자, 과잉 캐파 등 시장을 왜곡할 가능성이 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