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벌기보다 쓰는 스토리?…의심 받는 SK그룹 파이낸셜 스토리
입력 2022.09.22 07:00
    작년까지 성과 냈지만 올해 자본시장 침체하며 실효성 의문
    방향 있지만 실행 방법론 모호…답답한 계열사들은 볼멘소리
    "ESG 수행 역량·명분 아쉽다" 지적…'지주사 강화 목적' 시선도
    그룹 재무부담 증가세…대규모 '사회적 지출' 실효성도 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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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SK그룹 계열사들이 ‘파이낸셜 스토리’를 다시 짜느라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그간 SK그룹의 명분에 자본시장의 유동성이 화답하며 여러 성과를 내왔지만 올해는 분위기가 다르다. ‘변화해야 한다’는 방향성은 명확했으나 실행 방법론은 모호했다는 점이 드러나고 있다. 돈을 끌어모으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벌여둔 사업이 언제 이익을 내기 시작할지 모호하다. 그럼에도 투자는 멈출 수 없고, 앞으로 여기 저기 돈을 쓰겠다는 계획은 늘어가니 그룹 전반의 재무 부담은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2년전 ‘파이낸셜 스토리’를 화두로 던졌다. 이후 각 계열사들은 비주력 자산 정리, 지분을 활용한 투자금 유치, 주주 환원 확대 등 분주한 모습을 보였다. 결국 ‘파이낸셜 스토리’의 요체는 좋은 성장 전략을 제시해 높은 기업가치를 인정받는 것이다. 시장은 SK그룹의 비전에 공감했고, 이는 쏠쏠한 재무적 성과로 나타났다.

      올해 들어서는 파이낸셜 스토리에 의문의 목소리가 많아졌다. 전세계적으로 경기가 위축되면서 SK그룹의 성적표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다양한 미래 전략과 청사진을 제시해도 시장이 수긍하지 않았다. 여러 계열사가 증시 입성을 목전에 두고 멈춰야 했고, 투자 유치도 점점 어려워졌다. 정해둔 재무 성과에만 집착하는 SK그룹을 ‘선도자’에서 ‘약탈자’로 보는 시선도 늘었다.

      파이낸셜 스토리는 그룹의 ‘큰 그림’으로서의 기능은 했다. 단순한 재무 성과보다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공감을 얻을 전략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방침이 세워졌다. 그러나 세부적인 수치 목표를 달성하는 방법은 계열사가 오롯이 고민해야 했다. 임기가 있는 계열사 사장들은 다소간의 잡음이 발생하더라도 시장을 쥐어짤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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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K그룹은 올해 계열사 임원진 인사와 성과 평가 시 ‘주가’를 핵심 지표로 활용하기로 했다. 원래도 중요한 요소였지만 올해는 주가만으로 성과를 측정하는 원년이 될 것이란 평가가 나온다. 최태원 회장은 6월 확대경영회의에서 파이낸셜 스토리와 새로운 핵심성과지표(KPI), 평가·보상 등을 기업가치 분석 모델과 연계해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연초 대비 연말 주가에 따라 임원진의 입지가 달라질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까지는 웃을 수 있는 계열사가 보이지 않는다. 계열사 경영진 사이에선 ‘주가를 이론만으로 관리할 수 있느냐’는 볼멘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SK그룹의 파이낸셜 스토리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와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사업모델을 친환경 쪽으로 전환하고,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다. 각 계열사와 이사회 중심 경영으로 바꿨다. 주요 그룹 중 가장 먼저, 가장 적극적으로 ESG를 앞세웠으니 파이낸셜 스토리가 시장의 주목을 받았던 면이 있다.

      SK그룹은 2020년 국내 기업 최초로 RE100(재생에너지 100% 활용)에 가입했다. 계열사들은 수소, 연료전지, 폐기물 등 다양한 친환경 사업으로 보폭을 넓히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환경 사업을 하기 위해 필요한 돈의 상당 부분을 에너지, 화학, 반도체 등 에너지 소비가 많고 환경 부담이 큰 사업에서 마련하고 있다.

      친환경 화두를 던졌지만 이를 어떻게 달성할 것인가 하는 고민은 아직 부족한 모습이다. 결국은 탄소중립(넷제로)을 달성해야 하는데, 현재로서는 뾰족한 수가 없다. 탄소 배출 감축이 전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지 면밀히 살필 수 있는 역량도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그린워싱 논란을 피해야 하고, 고객과 투자자들에게 진정성도 보여야 한다.

      한 ESG 전문가는 “SK그룹 차원에서 넷제로를 앞당기자는 목표를 제시하면 계열사들은 그에 따른 전략을 내야하지만 당장 뾰족한 수는 없다”며 “화석 연료를 대체할 에너지원이 있는지, 국가 정책이 어떻게 변할지, 한 공정에서의 탄소감축이 기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종합적으로 봐야하지만 이런 역량을 가진 전문가가 거의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지난 8월 열린 SK그룹 이천포럼에선 ESG 실천 방안이 강조됐다. 최태원 회장은 이 자리에서 계열사들에 파이낸셜 스토리를 다시 수립하라는 주문을 했다. 재무 수치가 중요하지 않으며, 이해관계자와의 신뢰가 중요하다는 파이낸셜 스토리의 대전제는 그대로지만 실천 방법론은 틀렸다는 것이다. 각 계열사들은 총수의 메시지가 급진적이라 느끼면서도 움직여야 하는 상황이다. 포럼 전에 개략적인 방향은 공유되다 보니 각 계열사들에선 ESG 테마에 맞는 사업과 인수 대상을 물색하느라 분주한 모습을 보였다.

      SK그룹은 최태원 회장이 최대주주인 지주사 SK㈜가 주요 계열사들을 거느리는 구조다. 수십년 전부터 이사회 중심 경영을 표방했지만 여전히 그룹의 방향키는 총수가 공고히 쥐고 있다. 계열사 사장들은 최 회장의 입만 바라봐야 하는 상황이다. 계열사 자율 경영이라지만 각 회사의 사업 방향과 목표, 평가 방법을 설정하는 데는 최태원 회장과 수펙스추구협의회의 영향력이 클 수밖에 없다. SK그룹의 파이낸셜 스토리가 결국은 계열사 자금을 활용해 SK㈜의 자금력과 지배력을 높이기 위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많다.

      SK그룹 계열사들은 10월 최고경영자(CEO) 세미나에서 ‘숙제 검사’를 받아야 한다. 최태원 회장이 주문한 세부 실행 계획을 마련하느라 분주한 상황이다. SK그룹은 이 과정에서 컨설팅사 등 외부 자문은 받지 말라고 계열사에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체적으로 치열한 고민을 하라는 것인데 계열사 입장에선 답답할 수밖에 없다. SK그룹은 6월 확대경영회의를 앞두고 보스턴컨설팅그룹을 통해 계열사 주가 및 주식 시장의 거래 배수 등에 대한 컨설팅 용역을 맡긴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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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K그룹의 재무적 부담은 점점 커지는 상황이다. 친환경 사업을 늘리기 위해 적지 않은 자금이 들고 있다. 그룹의 방향성이 명확하니 거래 상대방의 눈높이는 올라갈 수밖에 없다. 자본시장이 침체한 만큼 SK그룹 계열사들이 투자자들에 더 많은 양보를 해야 하는 상황이다. 먼저 화두를 제시해 덕을 봤으니, 그에 합당한 성과도 내야 한다.

      SK그룹은 전기차 배터리, 반도체 등 주력 사업을 급격히 확장하면서 지분투자 및 자본적지출(CAPEX)이 빠르게 늘고 있다. 매년 20조원 이상의 CAPEX 부담이 있지만 사업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선 감수해야 한다. 배당 확대 등 주주환원 정책을 강화한 데 따른 자금 유출도 많아졌다. 실질적인 이익 실현에 앞서 ESG 경영, 주주환원 등이 강조되다 보니 그룹 전반의 재무구조가 점차 악화하고 있다. 전통산업이 꺾이고, 신산업이 더디게 성장하면 보릿고개를 경험할 가능성도 있다.

      SK그룹은 올해 채용 인원을 작년보다 50% 이상 늘리기로 했다. 창사 후 최대 규모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한다는 취지지만 부담은 있다. 계열사들은 최근 몇 해 구성원들의 요구에 맞춰 임금을 인상하기도 했다.

      SK그룹은 이달 비수도권 지역에 5년간 67조원을 투자한다는 청사진을 밝혔다. 각 계열사들이 저마다 이바지할 계획을 내놨다. 성장동력을 키우고, 지역 균형 발전이라는 사회적 과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겠지만 그룹의 재무구조에 부담이 될 수도 있다. 계획 수행까지 각종 변수가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청사진이 선언적 의미에 그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SK그룹의 ‘사회적 지출’이 이해관계자들의 신뢰를 얻고 궁극적으로 기업가치 증대로 이이질지 미지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