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日·獨서 빠진 러시아에서 질주하는 중국차…'잔류'도 '철수'도 어려운 현대차
입력 2022.11.02 07:00
    메르세데스-벤츠 철수 결정
    주요 완성차 기업 모두 脫러시아
    현대차·기아 러시아 생산기지 상트페테르부르크
    부품 생산부터 조립까지 유일한 생산공정
    유럽 내 전초기지 역할했지만, 전쟁 장기화에 '철수' 고민
    '철수' 시 러시아 국유화 정책에 막대한 손실 가능성
    수익성 악화에 잔류도 어려운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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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미국과 일본, 독일의 완성차 기업들은 모두 러시아를 떠났다. 서방국가 기업들이 철수를 결정하면서 그 반사이익은 오롯이 중국 완성차 업체들이 차지했다.

      사실 러시아는 현대차와 기아가 비교적 일찍 시장을 선점하며 높은 시장 점유율을 기록했지만 불확실한 국제 정세 속에 현대차와 기아도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가 장기화하면 현대차그룹 또한 철수에 대한 결단을 내려야 하지만 그 부담이 상당히 클 수 있단 평가가 나온다.

      28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메르세데스-벤츠(Mercedes-Benz)는 지난 3월 러시아 내 생산을 중단했고, 최근엔 현지 자회사 지분을 투자회사인 아브토돔(Avtodom)에 매각을 추진하고 있다. 메르세데스-벤츠의 지분 매각이 완료하면 러시아에 진출한 미국, 일본, 독일 등 주요 완성차 기업들은 모두 철수하게 된다.

      지난 3월 미국의 포드(Ford)와 제너럴모터스(GM)는 이미 납품과 생산을 중단했고, 일본의 토요타(Toyota)와 닛산(Nissan)도 각각 9월과 10월중 공장 철수를 결정했다. 아우디(Audi)와 BMW 등 주요 독일 완성차 업체 그리고 이탈리아 페라리(Ferrari), 스웨덴 볼보(Volvo), 프랑스 르노(Renault) 등도 모두 생산을 중단한 상태다.

      대부분의 완성차 기업들이 무기한 생산을 중단하거나 완전 철수를 결정했지만 러시아 현지 완성차 업체가 빈자리를 메우긴 역부족이다. 현지 브랜드들조차 부품 조달에 차질을 겪으면서 일부 모델은 생산을 멈춘 상태로 전해진다. 외국계 기업의 현지 이탈과 현지 브랜드도 수급에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 오히려 생산량을 늘리고 있는 곳은 중국 업체들이다.

      대한무역공사(Kotra)에 따르면 중국 완성차 제조기업 하발(Haval)은 지난 1분기 판매량이 전년 동기 대비 27%가량 증가했다. 러시아 정부의 지원을 받아 소비자들은 대출 우대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하발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 발발 이후 현지 브랜드 순위 3위까지 기록했고, 지난 8월엔 스포츠유틸리티(SUV) 차량 부문에서 1위를 달성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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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는 기아가 현지 차량 판매 순위 2위, 현대차가 3위를 기록하며 효자노릇을 하고 있는 시장이었다. 현대차의 러시아 내 생산기지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위치한 현대차 공장, 다른 한 곳은 칼리닌그라드에 위치한 러시아 기업 아브토토르(Avtotor) 공장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 현대차 공장에선 러시아 내 판매량이 높은 주력 차종(솔라리스, 크레타, 기아 리오)을 연간 22만가량을 생산한다.

      특히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은 현대글로비스와 현대위아를 비롯한 협력업체들이 동반 진출해 있다. 외국계 완성차 업체 가운데 부품생산부터 완성차 조립까지 전 공정을 갖춘 유일한 곳이다.

      실제로 러시아 생산기지는 현대차와 기아의 유럽 시장 확대를 위한 전초기지 역할을 해왔는데 현재 상황에선 전면적인 공급 전략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은 현재 생산을 중단하고, 생산 물량을 튀르키예를 비롯한 인근 공장으로 이전하는 작업을 진행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현대차와 기아 모두 시장 철수에 대한 결단을 내려야하는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 26일 주우정 기아 재경본부장은 컨퍼런스콜을 통해 “현지(러시아)에 A/S 사업만 운영하는 방안을 고려해야 할 수도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유럽의 전초 기지로서 러시아는 버릴 수만은 없는 지역이지만 현실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다른 완성차 업체들과는 달리 러시아는 현대차와 기아의 점유율과 시장 내 인지도가 상당히 높은 시장이기 때문에 시장 철수에 대해 선제적으로 나서기 어려운 측면도 고려해야 한다.

      철수에 따른 비용, 그리고 추후 발생할 수 있는 막대한 손실에 대한 충당금 부담도 불확실성을 키우는 요인이다. 아직까지 현대차와 기아는 러시아 철수에 대한 비용 부담을 충당금으로 반영하진 않았다. 시장 철수 이후 글로벌 공급망을 재편한다면 러시아 시장의 재진출은 더욱 어려워질 수 있다. 과거 우리나라 정부가 중국과의 무역갈등을 겪으며 현대차의 실적도 급감했지만, 아직까지 완전한 시장 철수에 대한 결단을 내리지 못한 것도 유사한 맥락이다.

      르노의 사례를 비춰보면 철수를 결정할 경우 현대차와 기아가 상당한 손실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에 놓일 수도 있다. 르노는 러시아 시장 철수를 결정하며 약 22억유로, 우리돈 3조원 수준의 러시아 자회사 지분을 1루블(약 23원)에 매각을 결정했다. 바이백 조건이 일부 담겨있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종전과 서방국가의 제재가 잇따르지 않는, 시장 정상화가 조건이기 때문에 추후 르노가 러시아 시장에 재진출할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는 평가다.

      투자은행(IB) 업계 한 관계자는 "러시아 정부가 철수하는 외국계 기업을 국유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가운데 현대차와 기아가 철수를 결정할 경우 막대한 손실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에 놓일 수 있다"며 "사실상 원매자가 없는 상황에서 (러시아) 자회사를 제 값에 매각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공장을 유지하는 비용 부담도 크기 때문에 현대차와 기아의 고민이 상당히 깊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