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력 경쟁' 벌인 회계법인들, 몇개월 만에 '일감 기근' 골머리
입력 2022.11.18 07:00
    팬데믹 후 거래 호황에 실적 잔치 누려
    인력 늘렸더니 몇 개월 새 시장 찬바람
    일감 기근에 중소형·저가 수임도 경쟁
    자문 외에 컨설팅·감사도 비슷한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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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대형 회계법인들은 지난 수년간 풍부한 유동성에 힘입어 괄목할 실적 개선을 이뤘다. 몰려드는 일감을 소화하기 위한 인력 쟁탈전도 벌였다. 이랬던 것이 불과 몇 달 전인데 지금은 분위기가 전혀 딴판이다. 오래지 않아 진정될 것으로 봤던 금리 상승세가 계속됐고 이는 거래 기근을 불러왔다. 

      회계법인으로선 당분간 일손을 놀리거나 저가 수임에라도 나서야 할 판이라 실적 고민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회계법인의 주업은 감사업무지만 이제는 그 외 세무나 M&A·가치평가 등 경영자문 의존도가 높아졌다. 2021 회계연도, 빅4 회계법인들의 회계감사 매출 비중은 27~40%고 경영자문 비중은 43~57%로 나타났다. 팬데믹 이후 막대한 유동성이 풀리며 시장의 거래가 넘쳐났고 회계법인의 일거리도 늘어났다.

      지난 2년여 사이 빅4 회계법인의 총 인력은 10% 안팎의 증가폭을 보였다. 그 기간 곳간이 두둑해진 스타트업과 투자 업계로 빠져나가는 인력도 많았다. 그러나 ‘10%가 나가면 20%를 더 뽑겠다’며 더욱 공격적인 인력 확충에 나섰다. 주니어 인력 이탈을 막기 위해 보상 체계를 손보는 한편, 다방면의 인재들에게 영입 제안을 보내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는 상반기까지도 한동안 이어졌다. 호실적에 힘입어 파트너 수도 꾸준히 늘었다.

    • 불과 몇 개월 사이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유동성 긴축의 영향이 본격화하며 회계법인을 찾는 발걸음이 뜸해졌다. 각 법인들은 지금까지의 성장세를 감안해 목표를 잡아뒀지만, 2022 회계연도에 접어든 시점에 거의 모든 거래가 중단됐다. 돈줄이 마른 투자업계의 인력 확충 수요가 사라지며 인력 이탈도 줄었다. 회계사 인력이야 꾸준히 있는 감사 업무에 배치하면 되지만, 회계사 자격이 없거나 외부에서 끌어온 인력들은 일감이 마땅찮은 상황이다.

      표면적으로는 회계법인의 자문 성적표가 나쁘지는 않다. 작년까지 거래가 많을 때는 풍부한 인력과 감사에 기반한 네트워크가 빛을 발했고, 올해도 내로라하는 외국계 투자은행(IB)과 증권사들과 견줘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빅4 모두 재무자문 순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올해 성과가 작년만 못하다. 거래 시장 침체의 영향으로 자문 금액이나 건수 모두 줄어든 모습이다. 올해 상위권에 이름을 올린 것도 IB들이 예년과 달리 대형 거래에서 큰 소득을 올리지 못한 반사효과를 본 것으로 풀이된다. 국내에서 소화되는 중소형 거래에 집중하며 근근이 살림을 꾸려가는 모습이다. IB들은 자문 건당 600만달러를 받기도 하지만 회계법인이 챙기는 수임료는 그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 상반기 초반까지만 해도 ‘웃돈’을 줘야 일을 받겠다는 분위기였지만, 이제는 ‘할인’을 해줘야 일을 잡을까 말까다. 일을 가려서 받을 상황이 아니다.

      한 IB 임원은 “얼마 전만해도 회계법인들은 돈잔치를 벌였지만 이제는 다들 어려워진 분위기”라며 “자문을 위해 기업을 방문하면 이미 빅4 회계법인이 다 왔다갔다고 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 이런 상황은 당분간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자문료 잘 챙겨주는 국내 대형 사모펀드(PEF)들은 대부분 투자 관망세로 돌아섰고, 외국계 PEF 대상으로는 수임 경쟁이 치열하다. 대기업들은 ‘현금 우선’을 외치며 곳간을 걸어잠갔는데, 연말 인사 이후에도 적극적인 확장 정책을 펴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한 빅4 회계법인 임원은 “거래 호황기가 영원할 줄 알았지만 몇 달 사이 시장금리가 팍팍 튀면서 춘궁기가 됐다”며 “회계법인들이 미래 실적을 추정한다지만 정작 자기 회사 1년을 추정하기도 쉽지 않다”고 말했다.

      비단 자문 업무뿐 아니라 컨설팅, 감사 등 분야도 비슷한 상황이다. 빅4 모두 컨설팅 역량 강화가 지상과제였고, 감사부문의 인력도 많이 늘렸었기 때문이다.

      최근 컨설팅 분야에선 전략 컨설팅보다 거래에 수반되는 실사 업무가 많았는데, 거래 자체가 줄어드니 실적을 내기 어려워졌다. 대형 컨설팅사를 시작으로 인력 구조조정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기대했던 ‘불황 자문’ 일감도 생각보다 늘지 않고 있다. 시장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고, 나빠질 것이란 우려만 가득하니 아무도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감사부문이 실적을 뒷받침해야 하지만 이 역시 수익성 악화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주기적 감사인 지정제에 따라 금융당국이 감사인을 지정할 때는 안정적인 감사보수를 챙길 수 있지만, 지정 감사 기간이 끝나면 다시 수임 경쟁을 펼쳐야 한다. 경쟁 과정에서 보수를 깎거나, 베테랑 투입 비중을 늘리는 등 기업의 편의를 들어줄수록 회계법인의 몫은 줄어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