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책은행이 밀알뿌린 반도체 벤처, 누이좋고 매부좋은 결실 날까
입력 2022.11.18 07:00
    산업은행, 반도체 스타트업 초기 투자 전담
    유망산업 초기 육성에 향후 회수 트로피도
    산은-기업 윈윈이지만…실적 개선은 아직
    '제살 깎아먹기? VS. 선의의 경쟁?' 관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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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국책은행이 집중 육성하는 반도체 밸류체인 벤처기업들은 내년 어떤 한 해를 맞게 될까. 주요 기업 대부분이 산업은행의 초기 지원을 발판으로 몸값을 빠르게 불려가고 있다. 최근 정부와 산업은행 모두 반도체 산업 육성 의지를 드러내는 만큼 다음 데카콘(기업가치 10조원 이상 비상장기업)은 이 업계에서 나올 것이란 기대가 많다.

      산업은행으로선 육성 산업의 초기 기업을 지원한다는 명분에 더해 막대한 투자회수라는 트로피를 쥘 수 있고, 반도체 벤처는 초기 자금 고비를 원활히 넘을 수 있으니 윈윈이다. 다만 아직 이들 기업이 미래가치 대비 실적이 부족한 점, 초기 투자 부담을 산업은행이 오롯이 지고 있다는 점은 걱정스럽다는 지적도 있다.

      산업은행은 지금까지 반도체 분야 스타트업을 적극 육성해 왔다. 파듀·퓨리오사AI·리벨리온·사피온·세미파이브 등 기업에 수백억원을 투자했다. 팹리스부터 디자인하우스까지 다양한 업종이 수혜를 봤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메모리 기반 저장장치(SSD) 컨트롤러 설계기업 파두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사위가 몸담았던 곳으로, 올해 4월 프리IPO에서 9000억원의 기업가치를 인정받았다. 작년 하반기 투자유치 당시 기업가치 4500억원을 인정받은 후 몇 개월만에 몸값이 두 배로 올랐다. 산은은 2017년 20억원을 투자한 초기 주주고, SK인포섹 등 SK그룹 계열사도 파두에 투자한 바 있다.

      파두는 최근 SK하이닉스와 협업으로 매출과 기업가치를 크게 끌어올렸다. 파두가 설계한 SSD 컨트롤러는 작년 4분기부터 양산에 돌입, SK하이닉스를 통해 미국 메타에 공급되기 시작했다. 작년 매출 52억원, 영업손실 337억원을 기록했지만 올해는 매출 500억원, 흑자전환 기대를 보이고 있다.

      퓨리오사AI, 세미파이브, 리벨리온은 산업은행으로부터 각각 100억원의 투자를 유치했다. 산업은행은 이들이 투자유치에 난항을 겪을 때 브릿지 투자를 실행하거나 후속투자에 나서는 등 구원투수로 나서 왔다. 한 기업은 "산업은행의 과감한 지원이 후속투자로 이어져 대규모 투자유치가 가능했다"고 사의를 표하기도 했다.

    • 투자업계에선 이들 반도체 밸류체인 스타트업의 향방에 시선을 두고 있다. 산은의 초반 집중 육성 덕에 대부분 유니콘(기업가치 1조원 이상 비상장 기업) 달성을 목전에 둔 상태다. 나아가 이커머스 플랫폼 쿠팡과 두나무 등에 이은 다음 데카콘이 이 분야에서 배출될 것이란 관측도 있다.

      반도체는 최근 국가 육성 주력산업으로 선정되며 더욱 활발한 투자가 예고됐다. 정부는 최근 ‘신성장 수출동력 확보 추진 계획'을 발표, 반도체에 1조원의 재정을 투입해 지원키로 했다. 산은도 반도체 유망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를 지속 확대할 것이란 입장을 밝히며 보조를 맞췄다. 강석훈 산은 회장은 '대한민국 경제 재도약 프로젝트'를 발표하면서 반도체를 그 중 1호 프로젝트로 선택했다.

      세계 시장에선 반도체 패권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미국이 중국으로 향하는 첨단 반도체 장비 수출을 규제하면서 세계 공급망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국 기업들은 이 규제를 1년간 유예받았지만 언제까지 유예조치가 이뤄질지 점치기 어렵다. 중국과 대만 등 파운드리 산업 강국들은 자국 팹리스 기업들을 보호 육성하고 있다. 영세한 국내 팹리스 업계의 설계·검증·생산이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 같은 사정 탓 국책은행으로서도 반도체 기술 벤처기업들에 대한 투자 규모를 키워서라도 지원사격에 나설 수밖에 없을 것이란 평가다. 산업은행 입장에선 정부 정책과 보조를 맞추면서 쏠쏠한 회수 성과도 기대할 수 있으니 금상첨화다. 기업 입장에선 초기 성장 자금을 얻고, 산업은행은 명분과 실리를 모두 챙기는 '윈윈' 투자다.

      한 투자사 관계자는 "우리는 초기 투자의 불확실성 때문에 투자하지 못했지만, 자금력 있는 산업은행이 나선 덕에 반도체 벤처들의 기업가치가 크게 뛰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는 이런 청사진이 순항하고 있지만, 최종 결과가 낙관적일 것으로 예단하긴 어렵다.

      산업은행이 투자한 반도체 벤처의 가치를 빠르게 끌어올린 건 실적 성장세보다도 미래가치에 기인한 측면이 크다. 리벨리온은 미국 월스트리트 금융시장에 적용 가능한 신경망처리장치(NPU)를, 모빌린트는 삼성전자 14나노 공정으로 고성능 에지 AI 반도체 '에리스' 개발에 성공했다. 세미파이브는 내년 초 5나노 공정을 적용한 HPC용 반도체 시제품을 출시할 계획이다.

      다만 이들 모두 영업적자로, 아직은 뚜렷한 실적 성장세를 보이진 않고 있다. 바이오 및 IT·테크 시장의 거품이 빠르게 걷히면서 성장을 기대할만한 산업은 반도체만 남은 형국이지만, 이들 기업도 '언제 돈을 벌 것이냐'는 물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한 업종을 국책은행이 전담해 육성하는 만큼 부작용을 우려하는 시각도 없지 않다.

      반도체 벤처에 정통한 회계법인 관계자는 "AI 반도체 팹리스 기업들은 수익성 이점 없이 오로지 투자와 미래가치로만 수천억원대 기업가치를 인정받아왔는데 앞으로 이들의 가치가 어떻게 유지될지가 업계에 중요한 지표가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 투자업계 관계자는 "국책은행으로서 반도체 투자는 좋은 트로피가 될 소재지만 단기간에 회수 실적을 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며 "산업은행 자금을 받은 기업들끼리 서로 기업가치를 깎아먹을지 아니면 선의의 경쟁을 통해 몸값을 끌어 올릴지도 관전포인트"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