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리·저성장에 다시 득세하는 CFO…'기회창출'에서 '돈줄관리'로 미션변경
입력 2022.12.14 07:00
    작년엔 신규 투자 위한 자금조달이 포커스
    올해는 전통적 재무관리에 좀 더 힘 실려
    향후 2~3년간 수익성·부채비율·유동성 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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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최근 몇 년간 재계에선 재무최고책임자(CFO) 전성기가 이어지고 있다. CFO 직급이 사장급으로 올라서기도 하고 CFO 출신들이 최고경영자(CEO)가 되는 사례도 있다. 올해 연말 재계 인사에서도 이런 분위기는 이어지고는 있지만 분위기는 작년과 사뭇 다르다.

      그동안은 저금리 시대에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기 위한 투자 활동 진작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인수합병(M&A)을 위한 딜소싱, 투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성공적인 기업공개(IPO), 누구보다 낮은 금리로 회사채 발행 등을 CFO에 기대했다.

      고금리 시대 도래는 CFO의 전통적인 역할을 다시 기대하게 만들었다. 내년 한국 기업들의 최우선 과제로 ▲수익성 방어 ▲자산건전성 제고 ▲유동성 확보가 꼽힌다. 경기 침체가 불가피한 상황에서 수익성과 자산건전성을 개선하기 어렵다보니 전반적인 신용등급 하방 압력이 커지고 있다. 이는 자금조달 환경 악화로 이어진다.

      일례로 재고 부담이 커진 반도체 기업들은 투자 규모를 유지하거나 축소하기로 했다. 골드만삭스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내년 시설투자금 합계는 55조원으로, 올해 65조9000억원보다 16.6% 줄어들 전망이다. 특히 SK하이닉스는 올해의 절반 수준으로 삭감하기로 결정했다. 철강, 석유화학 업계 역시 전방산업 수요 감소를 이유로 설비투자 규모를 줄이거나 아예 철회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CFO들은 새로운 ‘기회’를 찾는 것보다 지금보다 더 나빠지지 않게 ‘관리’를 하는 게 더 중요해졌다. 재계 연말 인사에서도 이 같은 분위기를 강조하고 있다.

      LG화학은 차동석 LG화학 CFO 부사장을 사장으로 승진시켰다. 차 사장은 회계, 금융, 세무, 경영 진단 등에 경험을 가진 재경 전문가로 CFO뿐 아니라 최고위기관리책임자(CRO)도 맡고 있다. 2019년 9월에 LG화학 CFO로 부임하며 M&A, 사업 분할을 지원했는데 어려운 경영 환경 속에서도 재무건전성 등을 공고하게 다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LG유플러스는 7년만에 CFO를 교체했다. 전통 재무라인 출신 이혁주 부사장의 뒤를 이을 인물로 '사내 최초 여성 전무'인 여명희 전무를 세웠다. 여 전무는 10여년간 LG유플러스에서 경영기획담당 임원으로 일하며 수익성 분석과 투자·비용 관리 등을 총괄해왔다.

      SK㈜는 재무통인 장동현 부회장이 유임된 가운데 이성형 CFO를 사장으로 승진시켰다. CFO 역할을 강화해 재무구조와 사업포트폴리오 최적화, 관리 기능을 총괄하도록 했다. 앞서 최태원 회장은 지난 10월 최고경영자(CEO) 세미나에서 "경영환경의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데이터 기반 경영전략 실행이 중요해질 것"이라며 CFO 역할론을 강조한 바 있다. SK그룹 계열사 대표들이 주로 전략통 또는 재무통으로 구성돼 있는 배경이기도 하다.

      삼성물산은 리스크 관리 재무전문가를 EPC(설계·조달·시공) 경쟁력 강화 태스크포스(TF) 사장 자리에 앉혔다. 건설부문 경영지원실장을 맡고 있는 강병일 부사장이 그 주인공으로 미래전략실 전략2팀 출신이기도 하다. 그 전엔 삼성물산의 자금부분 전체를 담당하는 CFO를 맡기도 했다. 다시 훈풍이 불고 있는 중동 시장에서의 잔존 리스크를 사전 차단하는 게 과제다. 금융시장 환경에 더 민감하게 대응해야 하는 삼성그룹 금융 계열사들은 이번 인사에서 대표들을 모두 유임, 변화보다는 안정을 택했다.

      현대차그룹은 주요 계열사 중 현대글로비스 대표이사만 교체했다. 이규복 신임 현대글로비스 대표는 재무와 전략기획 전문가로 현대차 미주지역 생산법인 CFO를 거쳤다. 수익성 중심의 해외권역 책임경영 체제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올해 재계 인사의 하이라이트는 롯데그룹이다. 롯데는 원래 임원 인사를 일찍 단행, 급변하는 경영 상황에 대비하고 내년 사업 계획 준비에 속도를 내려고 했다. 이를 위해 예년보다 보름가량 앞당겨 임원 평가를 시작했다. 그런데 롯데건설 유동성 위기가 불거지면서 늦춰졌다. 박현철 경영개선실장이 롯데건설 대표로 급하게 이동하게 돼 롯데지주 경영개선실장 자리는 공석이다. 신상필벌, 세대교체 분위기 속에서 그룹이 처한 상황을 감안하면 재무통의 존재감은 더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여러 불확실성이 걷히기 전까진 CFO들의 보수적 관리 모드는 유지될 가능성이 커보인다. 연초보다 돈을 빌리는 조건이 나빠진 만큼 차환에 잡음이 없어야 하고, 특히 제조기업들은 쌓이는 재고 문제를 잘 풀어야 한다. CFO들은 ‘얼마나 잘 벌었냐’ 보다는 ‘얼마나 잘 버텼냐’, 즉 어설픈 공격보다 확실한 수비로 내년 연말 성적표에서 더 큰 점수를 얻을 수 있다. 그러면서도 새로운 투자 기회를 포착, 확실한 성과를 내는 ‘역습’ 포인트를 쌓을 수 있다면 임원 평가상 ‘알파’ 점수를 얻을 수 있다.